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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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 하오문 (2)
하오문 (2)
내가 하오문주를 입에 담자 곳곳에 있던 하오문의 문도들이 검을 출수했다.
문도들의 전투력이 한참이나 낮다고 하는 하오문의 무인치고는 재빠른 출수였으나.
쏟아지는 검들이 내게 닿지는 못했다.
이를 본 무연이 문도들보다 한참 늦게 검을 뽑았지만, 순식간에 모든 검을 쳐냈기 때문이다.
“아까 공격적인 태도를 사과한다고 하더니 이건 조금 너무 하지 않을까?”
비웃듯 말했으나 도운추는 여전히 날 노려볼 뿐이다.
“이 정도면 정보면 의뢰비로 차고 넘칠 것 같은데 아닌가?”
“공자님에 대한 편견을 내려놔야겠군요.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네요.”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맞을걸?”
“어찌 아셨습니까?”
하오문주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하오문에서도 극비에 치는 일이다.
개방은 물론 정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이들이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하오문주라는 존재 자체가 비밀에 싸여있는 인물인데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이상한 거였다.
‘미래에서 알게 됐어요, 하면 믿어주긴 하려나?’
등신 취급하며 칼부림이 나면 났지, 좋은 영향은 없을 것 같다.
“계속 이상한 걸 묻네, 대답 해줄 리 없는 걸 알면서 묻는 이유가 뭐야?”
“구가가 가진 정보력이 이 정도라면 굳이 저희를 찾아올 필요가 있었습니까?”
“지부장, 나는 선문답이나 하자고 찾아온 게 아니야.”
도운추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었다.
톡 톡.
방안에 겉도는 묘한 침묵 사이, 손가락을 책상으로 두드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나는 당신한테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당신은 내가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줄 능력이 있잖아? 그거면 된거지.”
“공자님, 애초에 그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그건 당신네가 확인해야지. 왜 이렇게 빙빙 돌아가려 들지?”
난 톡톡 치던 손가락을 멈췄다.
도운추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가면이 진작에 깨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물불 가릴 처지에나 하는 거야 지부장. 필요 없으면 때려치워, 나도 개방이나 찾아가려니까.”
아, 여차하면 개방에다 하오문주에 관한 것도 조금 흘리고.
살짝 속삭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어떤 판단을 하든 이들의 몫이지만, 내가 볼 때 답은 정해져 있었다.
******************
“어찌 그냥 보내셨습니까.”
구양천이 떠난 뒤 방 안엔 하오문도 몇몇과 도운추만 남아있었다.
하오문도의 물음에 도운추가 쓴웃음을 흘렸다.
“시작부터 틀어져 있었어,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알면 모르는 것으로.
모르면 아는 것으로.
하오문의 철칙과 같은 말이었다.
도운추는 이 말을 토대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숱한 위기와 죽음의 선에서도 저 말 하나를 지키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소년에게 비밀 하나를 들켰다고 전체가 뒤흔들려 버렸다.
“...그냥 보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잡아서 고문이라도 해?”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야철아, 멍청한 얘기 하지 마렴, 하도 사대세가만 파고드니까 구가가 동네북처럼 보여?”
구가는 엄연한 명가(名家)다.
명가가 왜 명가인가.
여러 세기를 지나 쌓아 올린 힘과 명성이 드높아 명가인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성장을 멈추지 않았기에.
뒤처지지 않고 흐름에 따라 성장해왔기에 지금에 와서 명가라 불리는 것이다.
산서 땅에서 산서의 수호자인 구가를 건든다?
하물며 구가의 혈족이자 가주의 유일한 아들을 건드는 것은 잘못하다간 하오문 자체가 흔들릴 일이었다.
“구가만 엮였으면 모를까, 구가를 건들면 자연스럽게 정파인들에게 하오문을 공격할 명분을 쥐여주는 꼴이야. 이런 상황이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고.”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네가 멋대로 검을 휘두른 걸 탓하지 않는 것은 구가의 공자가 그걸 탓하지 않았음이 첫 번째 이유고, 이미 내 실수로 시작부터 망쳐버렸음이 그 두 번째 이유야.”
그리고 야철에게 말하지 않을 세 번째 이유는 구양천을 호위하던 청년이다.
언뜻 보기에 어리숙해 보이는 청년이었으나 구양천을 향해 뻗어가던 검날을 순식간에 쳐낸 것은 물론이고.
거기서 문도들이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려 들었다면….
‘분명 다 베려고 했었어.’
그가 검을 그 이상 휘두르지 않은 이유는 구양천을 향해 뻗어가던 검들에 살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위협할 용도로 뽑은 검들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호위 역시 검을 쳐냈을 뿐 반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운추는 호위가 휘두른 검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못해도 일류, 도운추의 무공 수준으론 보이지 않으나 어쩌면 일류 끝자락에 닿았을 무인.
그런 인물을 호위로 달고 올 정도면 애초에 벌어질 상황을 예측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복잡한 생각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는다.
구가의 소공자가 하오문을 찾아온 연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의뢰를 하기 위함일까.
그 소년이 홀로 알아 왔을 정보일 리는 없다. 필시 구가, 여차하면 구가의 가주까지 묶여있을 일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갑갑했다.
안 그래도 도운추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상황이 어렵기만 한데 여기서 다른 인물까지 껴 들어오니 좀처럼 답을 낼 수 없었다.
도운추가 손으로 자신의 턱 살을 잡더니 쭈욱 당겼다.
찌이익-
피부가 늘어나더니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벗겨진다.
구양천의 예상대로 인피면구였다.
도운추가 쓰고 있던 인피면구 속 얼굴엔 여인이 숨어있었다.
언뜻 보기엔 서늘해 보이는 눈동자와 가느다란 속눈썹, 햇빛 한 번 보지 않은 것 같은 흰 피부에 아름다운 여인.
도운추가 인피면구를 벗어던지자 야철이 물었다.
“벗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갑갑해서 그래. 조금만 이해해줘. 어차피 지금은 지켜보는 이도 없을 거야.”
남자치곤 미성이었던 목소리조차 여인의 가냘픈 음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돼. 문주님이 사라졌다는 걸 아는 이는 손에 꼽을텐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하오문의 특성상 문주를 문주로써 대해도 그를 존경하고 믿고 따르진 않는다.
오히려 문주가 되고 싶어 뒤를 노리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하오문주 또한 자신을 숨기고 사는 것이고.
그리고 당장 문주가 사라졌다고 다른 이가 대뜸 문주가 될 수는 없었다.
문주가 지닌 하오문의 증표를 계승해야 비로소 하오문의 문주로써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마 문주가 사라진 걸 알고 있는 다른 장로나 문도들도 이걸 위해 문주의 행방을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것이다.
구양천이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자신을 찾아왔을지 모르나 도운추가 보기에 얕은 정보로 찾아왔으리라 판단되진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을 찾아왔겠지.
‘그런 건 물불 가릴 처지에나 하는 거야.’
구양천이 뱉은 말이 귀에 맴돈다.
도운추는 행방불명된 하오문주를 떠올렸다.
‘...아버지.’
구양천의 말대로 자신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
‘좆될뻔 했다.’
하오문에서 볼일을 본 뒤 다시 저잣거리로 나왔다.
“아니 진짜 칼을 뽑아 드네 미친것들.”
비록 죽이려 드는 게 아닌 걸 알았지만 정말 칼을 뽑아 들 줄 몰랐다.
순간 식겁했다.
너무 오만하게 들이닥쳤던 걸까.
그 틈에서도 태연한 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무연이 보여준 검 때문이었다.
힐끔 돌아보니 무연이 이리저리 동공을 움직이며 주위를 살펴 보고 있었다.
‘어수룩하기만 한 것 같더니 움직임은 진짜였어.’
그래도 살아 돌아갈 수는 있겠다 싶은 마음 덕에 태연한 척 대화의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무연은 슬쩍 힐끔거리며 날 몰래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꾸 힐끔거리지 말고 궁금하면 물어봐.”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으실 것 같아 그렇습니다.”
“...진짜 눈치가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
“농담이야, 나도 나름 구가의 혈족인데 일이란 게 있을 수 있잖아.”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여차하면 사고를 하도 치고 다녔으니 하오문을 우연히 발견해 궁금해서 찾아가 봤다고 배 째란 식으로 나서면 되지 않을까.
사파를 찾아갔다는 게 혼나는 거로 끝날 일이 아니긴 했으나, 더 늦기 전에 필요한 우선순위였다.
‘가능하면 혼자 가는 게 마음이 편했을 텐데.’
무연을 끌고 간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물론 그 덕에 일이 잘 풀린 것 같았지만.
다행히 무연은 내 말에 트집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역시 저번에 억지를 써서 저잣거리에 나가셨던 이유가 있으셨군요.”
“저번에…?”
회귀한 첫날을 말하는 거겠지?
“장로께서 직접 도련님 무공을 손봐주신다고 하셨던 날, 도련님께서 싫다며 도망치신 날 말입니다. 저는 정말 싫어서 도망치신 줄 알았습니다.”
“어…?”
“장로께서 도련님이 도망친 걸 알고 다음에 보면 반쯤 조각내버릴 거다 하셨는데, 그조차 장로님과 같이 연기하신 건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역시 구가의 혈족은 작은 행동에도 이유가 있었네요…!”
“....”
좆될뻔 한 게 아니라 이미 좆된거였네. 미친놈 아니야 그걸 왜 도망쳐!
장로가 직접 무공을 손봐준다는 건 가주인 구철운이 직접 봐주는 걸 제외하면 혈족으로서 받을 수 있는 특혜 중 가장 큰 편일 것이다.
근데 그걸 힘들다는 이유로 튀었네.
이 미친놈아……. 나란 놈은 어쩜 이렇게 등신 같을까.
“약과나 사가자…….”
위설아가 맛있게 먹던 게 떠올라 몇 개 샀다.
근데 생각해보니 돈을 안 가져와서 무연이 내게 됐다. 나중에 줄 테니 그렇게 울상 짓지 말아 줄래?
아무튼 하오문쪽 일은 우선은 이걸로 멈춰둘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라고 도운추가 말했으나, 어차피 얼마 가지 않아 미끼를 물것이다.
몇 년 뒤 미래에 있을 ‘하오문주 탈환’이 그러했다. 지금쯤 흑야궁의 지하에 있을 하오문주 탈환을 위해 몇 년 뒤 하오문의 정예들이 흑야궁에 침투했던 일이다.
결과적으로 탈환은 실패하고 하오문주는 죽게 되었으나.
하오문주는 탈환을 주도했던 이로 교체됐고 이 사건은 여러 가지가 얽혀 하오문이 수면 위로 제대로 올라오게 되는 일이 되었다.
‘내가 정확히 아는 거라곤, 하오문주가 흑야궁 안에 5년은 넘게 붙잡혀 있었다는 것이고. 탈환을 주도했던 이가 산서 지부 출신이었다는 것.’
문주가 교체된 뒤 새로운 문주 또한 이전과 같이 종적을 감췄지만, 다급했던 상황에 차마 숨기지 못했던 흔적들이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탈환이라 말하지만, 사파에서 큰 세력인 흑야궁과 하오문의 엄연한 전쟁이었고, 이후 흑야궁은 무너지고 하오문은 반쯤 멸문까지 갔던 일이다.
하오문과의 싸움을 틈타 흑야궁을 무너트린 건 다름 아닌 무림맹이었다.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세상사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당시의 나조차 기억이 남을 일이었다.
‘운이 좋았지. 산서가 아니라 안휘나 섬서 쪽이었으면 거리상 시도도 못했을거야.’
반쯤 도박이었다.
당시 소문 속 그가 맞는지 아닌지, 애초에 지금 산서에 하오문 지부가 있는지, 혹 지부장인지 아닌지 모르고 일단 지르고 봤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반응에 조금의 답을 얻었지만.
상대가 하오문인 만큼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귀찮고 위험한 방식을 택하면서까지 해야 할 의뢰였다.
개방에 의뢰하던 직접 찾아 나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야 했다.
천유랑아(天有郞牙) 제갈혁.
어린 나이의 마교의 수뇌부 자릴 차지했던 사내.
마교의 두뇌 그 자체라 불리던 책사였다.
나는 그를 찾아 훗날을 위해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전날 저잣거리에 나간 김에 사 온 약과는 몇 개만 집어 먹고 위설아에게 주었다.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온몸에 향신료 범벅을 하고 있었다.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는데 어떻게 배우면 저 꼴이 되는 걸까.
그래도 열심히 하라며 약과를 주니 세상 신나 방방 뛰는 것이 ‘다음에도 사다 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약과는 적당히 다른 기솔들과 나눠 먹으라고 말해놨다.
무연은 돌아온 직후 보고를 하러 간다고 말했다.
나는 무연에게 오늘 일은 혈족의 일이니 비밀로 해달라 했다.
무연은 당연히 그러겠다 말했지만, 사실 보고한다 해도 수습할 구멍은 만들어 놨기에 긴장을 완전 풀진 않았다.
그렇게 다음날.
해가 뜨고 밖을 나가보니 무연과 검존이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다.
“...뭐지 저 특이한 그림은?”
검존은 어제와 같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고.
그 옆에서 무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르신 그래서 검수란 자고로 '검과 얼마나 동화되어야 하는 가'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허허.”
“예로…. 아 혹시 천하삼존이라고 아십니까? 삼존의 검존께서 달빛 아래 검무를 추시다 깨달음을 얻으셨단 얘길 제가 들었습니다. 그때 검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말이죠.”
“허허허허허!”
저게 뭔데.
저게 그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는 그거냐?
“저도 가끔 밤에 검을 수련하다 그런 느낌이 듭니다. 검이 가끔 말 거는 그 느낌말이죠. 그때 검을 휘두르면 몸에 감각이…. 아, 이렇게 설명해도 잘 모르시겠구나,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늙은이가 잘 모르는 얘기라 재밌게 듣고 있습니다.”
검존 앞에서 신나게 검에 대해 늘어놓고 있는 걸 보니, 보는 내가 더 창피했다.
더는 안될 거 같아 말 중에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야?”
무연과 검존이 나를 보고 예를 취했다. 무연은 둘째 치고 검존이 예를 취하는 걸 며칠째 봤음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게 어제 조금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누군가한테 말 떠들고 싶었나 봅니다.”
마음은 이해하나 하필 상대가 상대라서 문제였다.
무연의 머쓱함에 검존이 웃었다.
“도련님 저는 괜찮습니다. 쑥스럽게도 사내로 태어났음에도 검 한 번 안 잡아 본 터라 천하를 호령하는 젊은 무인의 얘길 들으니 저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진짜 천하를 호령했던 노인이 입 싹 닫고 모른 척 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와중에 칭찬을 들어선 지 어깨를 들썩거리는 무연이 조금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무연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이놈 지 자랑하다 까먹고 있었구만.
받아든 종이에는 붉은색으로 ‘구룡(俱龍)’이라 적혀 있다.
내가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기 무섭게 무연이 말했다.
“도련님, 오늘 구룡회에 가셔야 하는 날입니다.”
딱 봐도 귀찮아 보이는 게 튀어나왔다.
하오문 (2)
내가 하오문주를 입에 담자 곳곳에 있던 하오문의 문도들이 검을 출수했다.
문도들의 전투력이 한참이나 낮다고 하는 하오문의 무인치고는 재빠른 출수였으나.
쏟아지는 검들이 내게 닿지는 못했다.
이를 본 무연이 문도들보다 한참 늦게 검을 뽑았지만, 순식간에 모든 검을 쳐냈기 때문이다.
“아까 공격적인 태도를 사과한다고 하더니 이건 조금 너무 하지 않을까?”
비웃듯 말했으나 도운추는 여전히 날 노려볼 뿐이다.
“이 정도면 정보면 의뢰비로 차고 넘칠 것 같은데 아닌가?”
“공자님에 대한 편견을 내려놔야겠군요.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네요.”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맞을걸?”
“어찌 아셨습니까?”
하오문주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하오문에서도 극비에 치는 일이다.
개방은 물론 정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이들이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하오문주라는 존재 자체가 비밀에 싸여있는 인물인데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이상한 거였다.
‘미래에서 알게 됐어요, 하면 믿어주긴 하려나?’
등신 취급하며 칼부림이 나면 났지, 좋은 영향은 없을 것 같다.
“계속 이상한 걸 묻네, 대답 해줄 리 없는 걸 알면서 묻는 이유가 뭐야?”
“구가가 가진 정보력이 이 정도라면 굳이 저희를 찾아올 필요가 있었습니까?”
“지부장, 나는 선문답이나 하자고 찾아온 게 아니야.”
도운추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었다.
톡 톡.
방안에 겉도는 묘한 침묵 사이, 손가락을 책상으로 두드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나는 당신한테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당신은 내가 필요한 정보를 가져다줄 능력이 있잖아? 그거면 된거지.”
“공자님, 애초에 그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그건 당신네가 확인해야지. 왜 이렇게 빙빙 돌아가려 들지?”
난 톡톡 치던 손가락을 멈췄다.
도운추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가면이 진작에 깨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물불 가릴 처지에나 하는 거야 지부장. 필요 없으면 때려치워, 나도 개방이나 찾아가려니까.”
아, 여차하면 개방에다 하오문주에 관한 것도 조금 흘리고.
살짝 속삭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어떤 판단을 하든 이들의 몫이지만, 내가 볼 때 답은 정해져 있었다.
******************
“어찌 그냥 보내셨습니까.”
구양천이 떠난 뒤 방 안엔 하오문도 몇몇과 도운추만 남아있었다.
하오문도의 물음에 도운추가 쓴웃음을 흘렸다.
“시작부터 틀어져 있었어,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알면 모르는 것으로.
모르면 아는 것으로.
하오문의 철칙과 같은 말이었다.
도운추는 이 말을 토대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숱한 위기와 죽음의 선에서도 저 말 하나를 지키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소년에게 비밀 하나를 들켰다고 전체가 뒤흔들려 버렸다.
“...그냥 보냈으면 안 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잡아서 고문이라도 해?”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야철아, 멍청한 얘기 하지 마렴, 하도 사대세가만 파고드니까 구가가 동네북처럼 보여?”
구가는 엄연한 명가(名家)다.
명가가 왜 명가인가.
여러 세기를 지나 쌓아 올린 힘과 명성이 드높아 명가인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성장을 멈추지 않았기에.
뒤처지지 않고 흐름에 따라 성장해왔기에 지금에 와서 명가라 불리는 것이다.
산서 땅에서 산서의 수호자인 구가를 건든다?
하물며 구가의 혈족이자 가주의 유일한 아들을 건드는 것은 잘못하다간 하오문 자체가 흔들릴 일이었다.
“구가만 엮였으면 모를까, 구가를 건들면 자연스럽게 정파인들에게 하오문을 공격할 명분을 쥐여주는 꼴이야. 이런 상황이면 더더욱 조심해야 했고.”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네가 멋대로 검을 휘두른 걸 탓하지 않는 것은 구가의 공자가 그걸 탓하지 않았음이 첫 번째 이유고, 이미 내 실수로 시작부터 망쳐버렸음이 그 두 번째 이유야.”
그리고 야철에게 말하지 않을 세 번째 이유는 구양천을 호위하던 청년이다.
언뜻 보기에 어리숙해 보이는 청년이었으나 구양천을 향해 뻗어가던 검날을 순식간에 쳐낸 것은 물론이고.
거기서 문도들이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이려 들었다면….
‘분명 다 베려고 했었어.’
그가 검을 그 이상 휘두르지 않은 이유는 구양천을 향해 뻗어가던 검들에 살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위협할 용도로 뽑은 검들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호위 역시 검을 쳐냈을 뿐 반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운추는 호위가 휘두른 검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못해도 일류, 도운추의 무공 수준으론 보이지 않으나 어쩌면 일류 끝자락에 닿았을 무인.
그런 인물을 호위로 달고 올 정도면 애초에 벌어질 상황을 예측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복잡한 생각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는다.
구가의 소공자가 하오문을 찾아온 연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의뢰를 하기 위함일까.
그 소년이 홀로 알아 왔을 정보일 리는 없다. 필시 구가, 여차하면 구가의 가주까지 묶여있을 일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갑갑했다.
안 그래도 도운추는 자신에게 몰려오는 상황이 어렵기만 한데 여기서 다른 인물까지 껴 들어오니 좀처럼 답을 낼 수 없었다.
도운추가 손으로 자신의 턱 살을 잡더니 쭈욱 당겼다.
찌이익-
피부가 늘어나더니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벗겨진다.
구양천의 예상대로 인피면구였다.
도운추가 쓰고 있던 인피면구 속 얼굴엔 여인이 숨어있었다.
언뜻 보기엔 서늘해 보이는 눈동자와 가느다란 속눈썹, 햇빛 한 번 보지 않은 것 같은 흰 피부에 아름다운 여인.
도운추가 인피면구를 벗어던지자 야철이 물었다.
“벗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갑갑해서 그래. 조금만 이해해줘. 어차피 지금은 지켜보는 이도 없을 거야.”
남자치곤 미성이었던 목소리조차 여인의 가냘픈 음색으로 변해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돼. 문주님이 사라졌다는 걸 아는 이는 손에 꼽을텐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하오문의 특성상 문주를 문주로써 대해도 그를 존경하고 믿고 따르진 않는다.
오히려 문주가 되고 싶어 뒤를 노리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하오문주 또한 자신을 숨기고 사는 것이고.
그리고 당장 문주가 사라졌다고 다른 이가 대뜸 문주가 될 수는 없었다.
문주가 지닌 하오문의 증표를 계승해야 비로소 하오문의 문주로써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마 문주가 사라진 걸 알고 있는 다른 장로나 문도들도 이걸 위해 문주의 행방을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것이다.
구양천이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자신을 찾아왔을지 모르나 도운추가 보기에 얕은 정보로 찾아왔으리라 판단되진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을 찾아왔겠지.
‘그런 건 물불 가릴 처지에나 하는 거야.’
구양천이 뱉은 말이 귀에 맴돈다.
도운추는 행방불명된 하오문주를 떠올렸다.
‘...아버지.’
구양천의 말대로 자신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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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될뻔 했다.’
하오문에서 볼일을 본 뒤 다시 저잣거리로 나왔다.
“아니 진짜 칼을 뽑아 드네 미친것들.”
비록 죽이려 드는 게 아닌 걸 알았지만 정말 칼을 뽑아 들 줄 몰랐다.
순간 식겁했다.
너무 오만하게 들이닥쳤던 걸까.
그 틈에서도 태연한 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무연이 보여준 검 때문이었다.
힐끔 돌아보니 무연이 이리저리 동공을 움직이며 주위를 살펴 보고 있었다.
‘어수룩하기만 한 것 같더니 움직임은 진짜였어.’
그래도 살아 돌아갈 수는 있겠다 싶은 마음 덕에 태연한 척 대화의 우위를 선점할 수 있었다.
무연은 슬쩍 힐끔거리며 날 몰래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꾸 힐끔거리지 말고 궁금하면 물어봐.”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으실 것 같아 그렇습니다.”
“...진짜 눈치가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
“농담이야, 나도 나름 구가의 혈족인데 일이란 게 있을 수 있잖아.”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여차하면 사고를 하도 치고 다녔으니 하오문을 우연히 발견해 궁금해서 찾아가 봤다고 배 째란 식으로 나서면 되지 않을까.
사파를 찾아갔다는 게 혼나는 거로 끝날 일이 아니긴 했으나, 더 늦기 전에 필요한 우선순위였다.
‘가능하면 혼자 가는 게 마음이 편했을 텐데.’
무연을 끌고 간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물론 그 덕에 일이 잘 풀린 것 같았지만.
다행히 무연은 내 말에 트집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역시 저번에 억지를 써서 저잣거리에 나가셨던 이유가 있으셨군요.”
“저번에…?”
회귀한 첫날을 말하는 거겠지?
“장로께서 직접 도련님 무공을 손봐주신다고 하셨던 날, 도련님께서 싫다며 도망치신 날 말입니다. 저는 정말 싫어서 도망치신 줄 알았습니다.”
“어…?”
“장로께서 도련님이 도망친 걸 알고 다음에 보면 반쯤 조각내버릴 거다 하셨는데, 그조차 장로님과 같이 연기하신 건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역시 구가의 혈족은 작은 행동에도 이유가 있었네요…!”
“....”
좆될뻔 한 게 아니라 이미 좆된거였네. 미친놈 아니야 그걸 왜 도망쳐!
장로가 직접 무공을 손봐준다는 건 가주인 구철운이 직접 봐주는 걸 제외하면 혈족으로서 받을 수 있는 특혜 중 가장 큰 편일 것이다.
근데 그걸 힘들다는 이유로 튀었네.
이 미친놈아……. 나란 놈은 어쩜 이렇게 등신 같을까.
“약과나 사가자…….”
위설아가 맛있게 먹던 게 떠올라 몇 개 샀다.
근데 생각해보니 돈을 안 가져와서 무연이 내게 됐다. 나중에 줄 테니 그렇게 울상 짓지 말아 줄래?
아무튼 하오문쪽 일은 우선은 이걸로 멈춰둘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라고 도운추가 말했으나, 어차피 얼마 가지 않아 미끼를 물것이다.
몇 년 뒤 미래에 있을 ‘하오문주 탈환’이 그러했다. 지금쯤 흑야궁의 지하에 있을 하오문주 탈환을 위해 몇 년 뒤 하오문의 정예들이 흑야궁에 침투했던 일이다.
결과적으로 탈환은 실패하고 하오문주는 죽게 되었으나.
하오문주는 탈환을 주도했던 이로 교체됐고 이 사건은 여러 가지가 얽혀 하오문이 수면 위로 제대로 올라오게 되는 일이 되었다.
‘내가 정확히 아는 거라곤, 하오문주가 흑야궁 안에 5년은 넘게 붙잡혀 있었다는 것이고. 탈환을 주도했던 이가 산서 지부 출신이었다는 것.’
문주가 교체된 뒤 새로운 문주 또한 이전과 같이 종적을 감췄지만, 다급했던 상황에 차마 숨기지 못했던 흔적들이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탈환이라 말하지만, 사파에서 큰 세력인 흑야궁과 하오문의 엄연한 전쟁이었고, 이후 흑야궁은 무너지고 하오문은 반쯤 멸문까지 갔던 일이다.
하오문과의 싸움을 틈타 흑야궁을 무너트린 건 다름 아닌 무림맹이었다.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세상사에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당시의 나조차 기억이 남을 일이었다.
‘운이 좋았지. 산서가 아니라 안휘나 섬서 쪽이었으면 거리상 시도도 못했을거야.’
반쯤 도박이었다.
당시 소문 속 그가 맞는지 아닌지, 애초에 지금 산서에 하오문 지부가 있는지, 혹 지부장인지 아닌지 모르고 일단 지르고 봤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반응에 조금의 답을 얻었지만.
상대가 하오문인 만큼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귀찮고 위험한 방식을 택하면서까지 해야 할 의뢰였다.
개방에 의뢰하던 직접 찾아 나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야 했다.
천유랑아(天有郞牙) 제갈혁.
어린 나이의 마교의 수뇌부 자릴 차지했던 사내.
마교의 두뇌 그 자체라 불리던 책사였다.
나는 그를 찾아 훗날을 위해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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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저잣거리에 나간 김에 사 온 약과는 몇 개만 집어 먹고 위설아에게 주었다.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온몸에 향신료 범벅을 하고 있었다.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는데 어떻게 배우면 저 꼴이 되는 걸까.
그래도 열심히 하라며 약과를 주니 세상 신나 방방 뛰는 것이 ‘다음에도 사다 줘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약과는 적당히 다른 기솔들과 나눠 먹으라고 말해놨다.
무연은 돌아온 직후 보고를 하러 간다고 말했다.
나는 무연에게 오늘 일은 혈족의 일이니 비밀로 해달라 했다.
무연은 당연히 그러겠다 말했지만, 사실 보고한다 해도 수습할 구멍은 만들어 놨기에 긴장을 완전 풀진 않았다.
그렇게 다음날.
해가 뜨고 밖을 나가보니 무연과 검존이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다.
“...뭐지 저 특이한 그림은?”
검존은 어제와 같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고.
그 옆에서 무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르신 그래서 검수란 자고로 '검과 얼마나 동화되어야 하는 가'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허허.”
“예로…. 아 혹시 천하삼존이라고 아십니까? 삼존의 검존께서 달빛 아래 검무를 추시다 깨달음을 얻으셨단 얘길 제가 들었습니다. 그때 검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말이죠.”
“허허허허허!”
저게 뭔데.
저게 그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는 그거냐?
“저도 가끔 밤에 검을 수련하다 그런 느낌이 듭니다. 검이 가끔 말 거는 그 느낌말이죠. 그때 검을 휘두르면 몸에 감각이…. 아, 이렇게 설명해도 잘 모르시겠구나,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늙은이가 잘 모르는 얘기라 재밌게 듣고 있습니다.”
검존 앞에서 신나게 검에 대해 늘어놓고 있는 걸 보니, 보는 내가 더 창피했다.
더는 안될 거 같아 말 중에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야?”
무연과 검존이 나를 보고 예를 취했다. 무연은 둘째 치고 검존이 예를 취하는 걸 며칠째 봤음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게 어제 조금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누군가한테 말 떠들고 싶었나 봅니다.”
마음은 이해하나 하필 상대가 상대라서 문제였다.
무연의 머쓱함에 검존이 웃었다.
“도련님 저는 괜찮습니다. 쑥스럽게도 사내로 태어났음에도 검 한 번 안 잡아 본 터라 천하를 호령하는 젊은 무인의 얘길 들으니 저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진짜 천하를 호령했던 노인이 입 싹 닫고 모른 척 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와중에 칭찬을 들어선 지 어깨를 들썩거리는 무연이 조금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무연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이놈 지 자랑하다 까먹고 있었구만.
받아든 종이에는 붉은색으로 ‘구룡(俱龍)’이라 적혀 있다.
내가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기 무섭게 무연이 말했다.
“도련님, 오늘 구룡회에 가셔야 하는 날입니다.”
딱 봐도 귀찮아 보이는 게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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