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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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 네가 왜 거기서 나와?(2)
네가 왜 거기서 나와? 2
나이를 먹어도 사고를 치고 다니던 어느 날.
당시의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게 사고 쳤다 싶은 시점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다수의 표정이 무표정한 아버지가 드물게 노한 표정을 지었고, 세가의 혈족에겐 한없이 관대한 총관이 내게 직접 꾸지람까지 했던 큰 사고였다.
그 탓에 세가에서 내게 내린 형벌로서 첫째 누나가 대주로 있는 오검대로 가서 반년을 넘도록 굴려져야 했다.
물론 이 빌어먹을 성격이 그런다고 사그라지진 않았지만.
위설아를 제대로 마주한 건 그곳에서였다.
분명 그녀에겐 악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최소한 못해도 반년은 더 뒤에 일어나야 했을 일이었다.
근데 그랬어야 했을 위설아가 어째서 내 앞에, 그것도 내 처소에 있는 거지?
해가 뜨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식겁해서 주저앉을 뻔했다.
꿈인가. 꿈인 건가?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그래, 내가 어제 늦게 자기는 했지.”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이래서 사람은 잠을 자야 해.
미련 없이 뒤돌아 처소로 들어가려는데 누가 꾹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위설아가 가냘픈 손으로 내 옷을 당기고 있었다.
...설마 진짜라고?
“나…. 나….”
위설아가 더듬거리며 뭐라 말을 꺼내려 하는데 누군가 나타나서 위설아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얏!”
짧게 비명을 지르며 맞은 손등을 감싼 위설아가 뒤로 밀려났다.
나타난 인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설아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검존(劍尊) 위효군이 그곳에 있었다.
‘....시, 시바 깜짝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뻔했다.
뱉기만 했으면 그 순간 심장마비로 죽었을지 모르겠다.
위효군이 엄한 표정으로 위설아에게 말했다.
“위아 이 녀석! 도련님한테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할애비가 분명 말했거늘!”
...예?
방금 뭐라고…?
“얼른 사과드리거라.”
“죄송해요. 할부지….”
“어허! 사과는 도련님께 드려야지!”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
뭔데…. 대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일인데.
폭풍 같은 상황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위효군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왜 이러세요 진짜로….
“가주님에게 은혜를 입어 오늘부터 도련님을 보필하게 된 위문이라 합니다. 힘없는 늙은이라 마음에 안 드실지 모르나 최선을 다 할 터이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위문? 위효군이 아니라?
위효군이 위설아를 힐끔 보자 위설아가 다급히 다소곳한 자세를 취한다.
“앞, 앞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도련님을 보필하게 된, 위, 위설아 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 드립니다.”
보필? 누가 누구를…?
“나를…?”
순간 밀려온 현기증이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진짜 순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 미친 상황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검존 위효군이 누구인가.
무려 천하삼존(天下三尊)의 일인이다. 중원에 셀 수 없이 많은 무인 중 가장 강한 이로 뽑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중에 검존의 업적이라 하면 감히 나열하기도 벅찰 만큼 많은 사람이었다.
사파의 패왕이라 불리던 흑룡검이 검존과 싸움에서 겨우 열합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낭인 출신의 검객이면서 업적을 쌓고 쌓아 끝내는 정파의 중심인 무림맹주까지 올라간 사내였다.
남궁과 모용, 화산과 무당 등 검문으로써 이름을 떨치던 세가와 문파를 뒤로하고.
단신의 힘으로 중원제일검(中原第一劍)이라 불리던 검수.
천마가 중원에 나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 어쩌면 천하제일인일 줄 모르는 이가 그였다.
‘근데 뜬금없이 나를 보필하겠다고?’
왜?
심지어 가명까지 써서 정체를 숨겨가며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삼존이라면 당장 사대세가 중 어느 곳이나 새벽에 들이닥쳐도 두 팔 벌려 환영받을 존재였다.
그가 굳이 정체를 숨기며 이런 곳에서 사용인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구철운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건. 구철운이 보내서 왔다는 것일 터인데.
‘아버지는 알고 계신다는 건가?’
전생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때 위효군을 봤던 것도 잠깐 스치듯 만났던 인연이었을 뿐.
그마저 내가 지랄 맞게 사고 쳐놓은 것들 탓에 딱히 좋게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아팠다.
원래의 흐름을 유지하며 정마대전이 끝날 때까지 버텨내기만 할 예정이었는데.
마음을 먹자마자 알고 있던 미래가 비틀려 버렸다.
위효군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겉보기엔 인자한 미소를 지닌 왜소한 노인이었다. 전생에 잠깐이라도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평범한 노인으로 봤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도 위설아가 없었다면 생김새만 닮은 노인으로 알았을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물어야 할까.
왜 왔냐 따져야 하나? 그건 좀 이상한가.
위효군의 정체에 대해 아는 척하는 건 더 이상했다. 그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있어야 하는 건가?
가장 겁이 나는 것은 지금 이들이 이곳에 있으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차이가 하나 있다면, 저잣거리에서 위설아에게 과거와는 달리 상냥하게 대했다는 것.
근데 고작 그런 것 하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럼 지금이라도 옛날 성격을 살려서 이런 늙은이와 애새끼는 필요 없다며 깽판이라도 쳐야 하나.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울 때였다.
“손녀는.”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위효군이 입을 열었다.
“손녀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도련님이 보시기에 부족함이 많을 수 있으나, 배움이 빠른 아이이니 금방 도련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잘 교육 하겠습니다.”
그 말에 위효군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위설아가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 떨리는 눈동자가 살짝 보인다.
위설아에게 보이는 저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와 눈이 마주친 위설아가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뭐가 그리 간절한 거지. 당장 아버지나 구연서의 거처를 두고 왜 내 쪽으로 온 걸까.
결국, 나 또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답이 보이질 않는다. 이번 생은 뭔가 시작부터 좆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말에 위효군이 부디 말을 낮춰달라 부탁했지만.
그것까진 아무래도 무리였다.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구양천이 처소에서 구염화륜공을 수련하던 시각.
구철운은 처소에서 촛불 하나를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될 게 어디 있나,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을.”
“어르신, 어르신께서 원하신다면 사대세가는 물론, 맹주께서도 도움을 주실 걸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구태여 이런 고생을 하실 필요가….”
“나는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네 구가주.”
위효군이 다 식어버린 찻잔을 짚고 천천히 들이켰다.
“이까짓게 고생이라 할 수 없지. 손녀를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네, 오히려 이렇게라도 피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르신.”
“오히려 구가주가 이 쓸모없는 늙은이와의 인연 탓에 무거운 부탁을 들어주게 했으니 그것이 미안한 일이야.”
“어르신 저는.”
“소림과 무당에서 설아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네. 자네에겐 더없이 무거운 빚을 들게 한 것이지.”
위효군의 눈을 보며 구철운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실은 구가주, 자네에게조차 찾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네, 무당이고 소림이고 어떤가, 내가 마음먹고 산골에 틀어박히면 천안을 가졌다는 땡중놈도 날 못 찾을 텐데.”
“...헌데 어째서.”
“죽어가는 늙은이의 욕심이지. 이런 노인네랑 단둘이 사는 게 설아에게 마냥 행복할 일은 아니라 생각했으니, 아주 조금은 세상을 경험하길 바랐네.”
“그렇다면 더더욱 하다못해 제 거처에서 지내시지요, 제 자식이지만 그 아이는 부족함이 많은 아이입니다.”
구철운은 위효군이 구태여 자신의 자식인 구양천의 처소에서 지내고 싶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딸 아이들과 달리 남아인 구양천은 아직 철이 없는 아이였다. 삐뚤어진 성정을 아비로서 바로 잡고 싶었으나 연이어 터지는 일들에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하물며 저잣거리에서 마주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여 구양천이 몹쓸 말이라도 했을까 위효군에게 사과부터 건네지 않았는가.
구철운의 말에 위효군이 허허 웃었다.
“들은 소문이 있어 나도 걱정했네만, 훨씬 점잖은 아이였다 하지 않았는가. 구가주가 보기보다 자식 욕심이 좀 많구먼 그래.”
위효군도 구가의 셋째 자식에 대한 소문을 산서에 와서 들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산서 전역에 구가의 소공자의 인성이 그렇게 난폭하다 소문이 퍼졌을까.
딸 복은 그렇게 많은 가주가 아들 운은 없었던 건가 위효군은 생각했다.
와중에 저잣거리에서 구양천과 마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신이 난 손녀를 차마 막지 못하고 뛰게 두었던 탓이었다.
그러던 중 손녀가 또래 남아에게 말을 건 것을 보았다.
남아가 구가의 아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몸 안에 흐르는 화기가 구가주의 기운과 똑같았으니.
구가주의 자식인 것에 비해 담긴 기운이 미약한게 흠이었으나, 그건 분명 구염화륜공이 맞았다.
구양천의 인상은 첫인상은 눈매가 쫙 찢어지고 날카로운 것이 얼굴로 한 성격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손녀는 구가의 아이에게 해맑게 감자 하나를 건넸다.
소문과 같이 난폭한 아이면 어찌해야 할까.
위효군은 생명에 위협이 갈 일이 아니라면 가서 손녀를 구할 생각은 아니었다.
세상엔 선한 말만 해주는 이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경험이기도 했으니.
허나 예상과 달리 남아는 몹쓸 말을 꺼내지도 행동으로 무언갈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손녀를 내치려는 호위의 행동을 제지하며 손녀에게 약과를 건넸다.
뒤늦게 손녀에게 다가간 위효군을 보며 예를 취하기까지. 추레한 옷차림을 보면 하찮은 신분이라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효군아. 아직도 스스로 수련이 부족하구나.’
검존이란 허명을 들으니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라 생각했던가.
위효군은 자신을 질책했다.
아이의 얼굴과 소문만 듣고 판단했던 자신이 참 어리석어 보였다.
“그 아이면 충분하네. 오히려 구가주의 아이가 우릴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말일세.”
혹시 소문과 같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때 구양천이 위설아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알겠습니다 어르신, 혹여 문제가 생긴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구철운은 어찌 위효군이 구양천을 좋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얘기가 끝나갈 즈음 구철운이 다시금 물었다.
“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처음 물은 것과는 다른 물음이었다.
위효군 또한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있기에 쉬이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장께서 말을 꺼내셨다면….”
소림의 방장은 천안(天眼)을 가져 인과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위효군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그 친구가 그리 말을 꺼냈으면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지만 자네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겠나.”
순간 창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겨우 붙어있던 작은 촛불이 꺼졌다.
“다가올 혈겁(血劫)의 중심에 설아가 있다는 것이, 우리 설아가 검을 잡아야 혈겁을 견딜 수 있다는 게.”
위효군 끌끌하며 웃는다.
말을 꺼내면서 잔뜩 진 주름이 조금씩 진해지는 듯한 착각이 이렀다.
“그래서 도망쳤지. 이기적이라 해도 상관없네. 왜 하필 설아였을까. 얄궂지 않은가. 삼존이라며 떠받들어주는 노인네도 있고, 정파의 기둥이라며 허리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명문가들도 넘치는데.”
“어르신….”
이상과 현실에 치여 지쳐버린 위효군의 모습에서 심마(心魔)가 느껴졌다.
“꽃을 쥐여줘도 모자랄 판에 혈겁이 벌어질 거라며 칼을 쥐여줄 수는 없네.”
위효군은 주름진 손으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그러니 내가 영혼까지 재가 되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설아에게 절대 칼을 쥐여주지 않을걸세.”
구양천이 들었으면 땅을 치며 절망했을 얘기였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2
나이를 먹어도 사고를 치고 다니던 어느 날.
당시의 내가 생각해도 좀 과하게 사고 쳤다 싶은 시점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다수의 표정이 무표정한 아버지가 드물게 노한 표정을 지었고, 세가의 혈족에겐 한없이 관대한 총관이 내게 직접 꾸지람까지 했던 큰 사고였다.
그 탓에 세가에서 내게 내린 형벌로서 첫째 누나가 대주로 있는 오검대로 가서 반년을 넘도록 굴려져야 했다.
물론 이 빌어먹을 성격이 그런다고 사그라지진 않았지만.
위설아를 제대로 마주한 건 그곳에서였다.
분명 그녀에겐 악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최소한 못해도 반년은 더 뒤에 일어나야 했을 일이었다.
근데 그랬어야 했을 위설아가 어째서 내 앞에, 그것도 내 처소에 있는 거지?
해가 뜨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식겁해서 주저앉을 뻔했다.
꿈인가. 꿈인 건가? 그래, 이건 꿈일 거야.
“그래, 내가 어제 늦게 자기는 했지.”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이래서 사람은 잠을 자야 해.
미련 없이 뒤돌아 처소로 들어가려는데 누가 꾹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위설아가 가냘픈 손으로 내 옷을 당기고 있었다.
...설마 진짜라고?
“나…. 나….”
위설아가 더듬거리며 뭐라 말을 꺼내려 하는데 누군가 나타나서 위설아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얏!”
짧게 비명을 지르며 맞은 손등을 감싼 위설아가 뒤로 밀려났다.
나타난 인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설아만으로도 어이가 없는데 검존(劍尊) 위효군이 그곳에 있었다.
‘....시, 시바 깜짝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뻔했다.
뱉기만 했으면 그 순간 심장마비로 죽었을지 모르겠다.
위효군이 엄한 표정으로 위설아에게 말했다.
“위아 이 녀석! 도련님한테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할애비가 분명 말했거늘!”
...예?
방금 뭐라고…?
“얼른 사과드리거라.”
“죄송해요. 할부지….”
“어허! 사과는 도련님께 드려야지!”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
뭔데…. 대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일인데.
폭풍 같은 상황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위효군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왜 이러세요 진짜로….
“가주님에게 은혜를 입어 오늘부터 도련님을 보필하게 된 위문이라 합니다. 힘없는 늙은이라 마음에 안 드실지 모르나 최선을 다 할 터이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위문? 위효군이 아니라?
위효군이 위설아를 힐끔 보자 위설아가 다급히 다소곳한 자세를 취한다.
“앞, 앞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도련님을 보필하게 된, 위, 위설아 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 드립니다.”
보필? 누가 누구를…?
“나를…?”
순간 밀려온 현기증이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진짜 순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 미친 상황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검존 위효군이 누구인가.
무려 천하삼존(天下三尊)의 일인이다. 중원에 셀 수 없이 많은 무인 중 가장 강한 이로 뽑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중에 검존의 업적이라 하면 감히 나열하기도 벅찰 만큼 많은 사람이었다.
사파의 패왕이라 불리던 흑룡검이 검존과 싸움에서 겨우 열합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낭인 출신의 검객이면서 업적을 쌓고 쌓아 끝내는 정파의 중심인 무림맹주까지 올라간 사내였다.
남궁과 모용, 화산과 무당 등 검문으로써 이름을 떨치던 세가와 문파를 뒤로하고.
단신의 힘으로 중원제일검(中原第一劍)이라 불리던 검수.
천마가 중원에 나타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 어쩌면 천하제일인일 줄 모르는 이가 그였다.
‘근데 뜬금없이 나를 보필하겠다고?’
왜?
심지어 가명까지 써서 정체를 숨겨가며 굳이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삼존이라면 당장 사대세가 중 어느 곳이나 새벽에 들이닥쳐도 두 팔 벌려 환영받을 존재였다.
그가 굳이 정체를 숨기며 이런 곳에서 사용인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구철운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건. 구철운이 보내서 왔다는 것일 터인데.
‘아버지는 알고 계신다는 건가?’
전생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때 위효군을 봤던 것도 잠깐 스치듯 만났던 인연이었을 뿐.
그마저 내가 지랄 맞게 사고 쳐놓은 것들 탓에 딱히 좋게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아팠다.
원래의 흐름을 유지하며 정마대전이 끝날 때까지 버텨내기만 할 예정이었는데.
마음을 먹자마자 알고 있던 미래가 비틀려 버렸다.
위효군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겉보기엔 인자한 미소를 지닌 왜소한 노인이었다. 전생에 잠깐이라도 그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평범한 노인으로 봤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도 위설아가 없었다면 생김새만 닮은 노인으로 알았을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뭘 물어야 할까.
왜 왔냐 따져야 하나? 그건 좀 이상한가.
위효군의 정체에 대해 아는 척하는 건 더 이상했다. 그럼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있어야 하는 건가?
가장 겁이 나는 것은 지금 이들이 이곳에 있으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차이가 하나 있다면, 저잣거리에서 위설아에게 과거와는 달리 상냥하게 대했다는 것.
근데 고작 그런 것 하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럼 지금이라도 옛날 성격을 살려서 이런 늙은이와 애새끼는 필요 없다며 깽판이라도 쳐야 하나.
무수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울 때였다.
“손녀는.”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위효군이 입을 열었다.
“손녀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도련님이 보시기에 부족함이 많을 수 있으나, 배움이 빠른 아이이니 금방 도련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잘 교육 하겠습니다.”
그 말에 위효군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위설아가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 떨리는 눈동자가 살짝 보인다.
위설아에게 보이는 저 불안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와 눈이 마주친 위설아가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뭐가 그리 간절한 거지. 당장 아버지나 구연서의 거처를 두고 왜 내 쪽으로 온 걸까.
결국, 나 또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답이 보이질 않는다. 이번 생은 뭔가 시작부터 좆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말에 위효군이 부디 말을 낮춰달라 부탁했지만.
그것까진 아무래도 무리였다.
******************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구양천이 처소에서 구염화륜공을 수련하던 시각.
구철운은 처소에서 촛불 하나를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될 게 어디 있나,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을.”
“어르신, 어르신께서 원하신다면 사대세가는 물론, 맹주께서도 도움을 주실 걸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구태여 이런 고생을 하실 필요가….”
“나는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네 구가주.”
위효군이 다 식어버린 찻잔을 짚고 천천히 들이켰다.
“이까짓게 고생이라 할 수 없지. 손녀를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네, 오히려 이렇게라도 피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르신.”
“오히려 구가주가 이 쓸모없는 늙은이와의 인연 탓에 무거운 부탁을 들어주게 했으니 그것이 미안한 일이야.”
“어르신 저는.”
“소림과 무당에서 설아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네. 자네에겐 더없이 무거운 빚을 들게 한 것이지.”
위효군의 눈을 보며 구철운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실은 구가주, 자네에게조차 찾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네, 무당이고 소림이고 어떤가, 내가 마음먹고 산골에 틀어박히면 천안을 가졌다는 땡중놈도 날 못 찾을 텐데.”
“...헌데 어째서.”
“죽어가는 늙은이의 욕심이지. 이런 노인네랑 단둘이 사는 게 설아에게 마냥 행복할 일은 아니라 생각했으니, 아주 조금은 세상을 경험하길 바랐네.”
“그렇다면 더더욱 하다못해 제 거처에서 지내시지요, 제 자식이지만 그 아이는 부족함이 많은 아이입니다.”
구철운은 위효군이 구태여 자신의 자식인 구양천의 처소에서 지내고 싶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딸 아이들과 달리 남아인 구양천은 아직 철이 없는 아이였다. 삐뚤어진 성정을 아비로서 바로 잡고 싶었으나 연이어 터지는 일들에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하물며 저잣거리에서 마주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여 구양천이 몹쓸 말이라도 했을까 위효군에게 사과부터 건네지 않았는가.
구철운의 말에 위효군이 허허 웃었다.
“들은 소문이 있어 나도 걱정했네만, 훨씬 점잖은 아이였다 하지 않았는가. 구가주가 보기보다 자식 욕심이 좀 많구먼 그래.”
위효군도 구가의 셋째 자식에 대한 소문을 산서에 와서 들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산서 전역에 구가의 소공자의 인성이 그렇게 난폭하다 소문이 퍼졌을까.
딸 복은 그렇게 많은 가주가 아들 운은 없었던 건가 위효군은 생각했다.
와중에 저잣거리에서 구양천과 마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신이 난 손녀를 차마 막지 못하고 뛰게 두었던 탓이었다.
그러던 중 손녀가 또래 남아에게 말을 건 것을 보았다.
남아가 구가의 아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몸 안에 흐르는 화기가 구가주의 기운과 똑같았으니.
구가주의 자식인 것에 비해 담긴 기운이 미약한게 흠이었으나, 그건 분명 구염화륜공이 맞았다.
구양천의 인상은 첫인상은 눈매가 쫙 찢어지고 날카로운 것이 얼굴로 한 성격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손녀는 구가의 아이에게 해맑게 감자 하나를 건넸다.
소문과 같이 난폭한 아이면 어찌해야 할까.
위효군은 생명에 위협이 갈 일이 아니라면 가서 손녀를 구할 생각은 아니었다.
세상엔 선한 말만 해주는 이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경험이기도 했으니.
허나 예상과 달리 남아는 몹쓸 말을 꺼내지도 행동으로 무언갈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손녀를 내치려는 호위의 행동을 제지하며 손녀에게 약과를 건넸다.
뒤늦게 손녀에게 다가간 위효군을 보며 예를 취하기까지. 추레한 옷차림을 보면 하찮은 신분이라 생각했을 텐데 말이다.
‘효군아. 아직도 스스로 수련이 부족하구나.’
검존이란 허명을 들으니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라 생각했던가.
위효군은 자신을 질책했다.
아이의 얼굴과 소문만 듣고 판단했던 자신이 참 어리석어 보였다.
“그 아이면 충분하네. 오히려 구가주의 아이가 우릴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말일세.”
혹시 소문과 같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때 구양천이 위설아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알겠습니다 어르신, 혹여 문제가 생긴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구철운은 어찌 위효군이 구양천을 좋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얘기가 끝나갈 즈음 구철운이 다시금 물었다.
“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처음 물은 것과는 다른 물음이었다.
위효군 또한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있기에 쉬이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장께서 말을 꺼내셨다면….”
소림의 방장은 천안(天眼)을 가져 인과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위효군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그 친구가 그리 말을 꺼냈으면 필시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지만 자네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겠나.”
순간 창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겨우 붙어있던 작은 촛불이 꺼졌다.
“다가올 혈겁(血劫)의 중심에 설아가 있다는 것이, 우리 설아가 검을 잡아야 혈겁을 견딜 수 있다는 게.”
위효군 끌끌하며 웃는다.
말을 꺼내면서 잔뜩 진 주름이 조금씩 진해지는 듯한 착각이 이렀다.
“그래서 도망쳤지. 이기적이라 해도 상관없네. 왜 하필 설아였을까. 얄궂지 않은가. 삼존이라며 떠받들어주는 노인네도 있고, 정파의 기둥이라며 허리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명문가들도 넘치는데.”
“어르신….”
이상과 현실에 치여 지쳐버린 위효군의 모습에서 심마(心魔)가 느껴졌다.
“꽃을 쥐여줘도 모자랄 판에 혈겁이 벌어질 거라며 칼을 쥐여줄 수는 없네.”
위효군은 주름진 손으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그러니 내가 영혼까지 재가 되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설아에게 절대 칼을 쥐여주지 않을걸세.”
구양천이 들었으면 땅을 치며 절망했을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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