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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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 철의 여인. (2)
철의 여인. (2)
찰박- 찰박-
깊게 고인 피 웅덩이를 밟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시체로 쌓인 산과 절벽은 이제는 익숙한 풍경일 뿐이다.
성한 곳이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 썩고 부패한 시체들, 공기에 섞여 자욱하게 풍기는 냄새는 분명 지독한 독기(毒氣)였다.
멀쩡하던 대지는 독에 절여져 썩고 갈라진 땅이 되어있었다.
과연 이 넓은 대지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아마 못해도 수 세기는 걸리겠지.
걸으면서도 쉴 새 없이 몸속에 기운을 돌려 독기를 차단했다.
그리 활발하고 찬란하던 사천의 땅은 이미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피 웅덩이를 밟고 밟아 길을 뚫은 끝에는 들끓는 독기의 원주(原主)가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초록빛을 머금던 두 눈동자는 잔인하게 파내어져 핏물만 진득하니 남아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제 끝난 건가, 독비(毒妃).]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독비 당소열이 내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당신인가요.]
청량하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가래가 들끓는 지치고 지쳐버린 목소리였다.
[우스운 모습이구나, 네년의 혈족은 진작에 다른 땅으로 도망쳤거늘…. 홀로 이곳을 지킨다고 뭐가 달라질 거로 생각했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죠.]
[한데 어째서?]
내 말에 당소열이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웃는다.
[그럼 당신은 어째서 이곳에 왔나요.]
[멍청한 물음이다. 당연한 말 아닌가, 네년의 마지막 남은 숨통을 끊으러 온 것이다.]
[그렇군요.]
찰박.
천천히 당소열에게 걸어갔다. 이상한 것은 걸음을 옮길수록 독기가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당소열이 이곳에 남은 틈에 당문의 혈족은 안전하게 소림으로 가기 위한 대피 길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이후를 위한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당소열은?
[멍청한 것.]
홀로 남게 된 그녀에겐 무엇이 남아있을까.
훗날 만일 정파가 전쟁에 승리한다면, 역사에 짧게 한 줄 정도는 그어지겠지.
-독비 당소열의 희생으로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고작 그것 한 줄 남을 것이다. 참으로 부질없는 얘기다.
이틀.
다름 아닌 당소열 혼자 쏟아지는 마인들과 사투를 벌이며 사천을 지켜낸 시간이다.
당소열의 두 눈이 뽑히고 당문이 있던 땅 주위엔 지독한 독기라 쌓였다.
그 사이 셀 수 없이 많은 마인의 죽음을 만들어냈으나.
또한 고작이다.
천마가 죽지 않는 이상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녀의 앞으로 당도하니 당소열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참 미안합니다.]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마인에게 사과를? 진정 정신이 나가버렸구나. 독비.]
[예, 제가 드디어 정신을 놨나 보네요, 차라리 조금 더 일찍 놓을 걸 그랬어요……. 두 눈을 잃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네요.]
[헛소리는 거기까지다. 남길 말은 그뿐인가.]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목을 손으로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만큼 얇은 목이었다.
[주제에 할 수 있는 바람이 아니지만,
부디 세상에 남은 시간이 있다면.]
파르르 떨리는 몸, 나는 그녀가 무슨 감정을 품고서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은 이의 푸념, 이제야 겪는 희생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을까.
그 어떤 것도 내가 관심을 둘 일은 아니었다.
[당신이…….]
당소열은 말을 이었지만,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뭐라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어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당소열이 고개를 푹 숙인다.
손을 떼고 몸을 비키니 당소열의 몸이 힘없이 땅으로 쓰러진다.
주위 핏물은 모두 독기에 침식되어있다.
아무리 만독불침이라 한들 숨이 끊어져 내기가 빠져나간 육신은 금방 썩고 녹아내릴 것이다.
고된 희생을 끝냈으나 육신의 한 조각조차 남기지 못하겠지.
희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사천 땅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뗐다.
주위 독기 탓일까, 이곳에 서 있는 게 너무 역겨울 지경이었다.
이 땅도.
나 자신도.
******************
“대답하지 않으실 겁니까.”
상념이 끝났다.
이럴 때만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너무 잘 나는 게 싫었다. 나는 당소열의 눈과 마주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독불침의 영향으로 한쪽 눈만 초록빛이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양쪽 눈이 다 녹색으로 물들 것이다.
독비 당소열, 아니 지금은 독봉(毒鳳)이려나.
“대답하지 않겠다면 사람을….”
당소열이 말하려는데 남궁비아가 옆에서 뭐라 속삭인다.
남궁비아의 말에 당소열이 찌푸리던 인상을 풀었다.
이거 내게 한 발짝 가까이 오더니 예를 차린다.
“당문의 당소열이라고 합니다. 본가를 찾아주신 손님께 과하게 언성을 높인 점 사과드립니다.”
망설임 없는 빠른 판단이었다.
“...구절엽이라고 합니다.”
나도 대답했으나 역시 구절엽의 이름을 빌려 썼다.
이걸 빨리 관두든가 해야지…. 아 그냥 지금이라도 깔까?
내가 조금이라도 유명했으면 안 통했을 방법인데 내 이름에 관해서는 왜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을까.
당장 1년만 지나있었어도 내 이름만 말하면 산서의 개새끼라고 정평이 나 있었을 텐데.
격렬한 고민을 하는 와중에 당소열이 말했다.
“그렇군요. 구 공자님, 이곳은 본문의 사람이 아닌 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옆에 남궁 소저 또한 외인 아닙니까?”
“혈족이 허락했으니 괜찮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허락한 적 없으니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치사하네 진짜….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게다가 당소열의 날카로운 눈빛이 계속 쏟아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왜 날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까? 여길 들어온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얘길 끝내고 위설아와 함께 발길을 돌렸다.
떠난 뒤 남궁비아는 옆에 당소열을 보며 물었다.
“소열.”
“네 언니.”
“왜 그렇게 무섭게 째려봤어?”
“...잘못 들어왔다고 지적하니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요.”
“아….”
“지 잘생기면 단가? 하여튼 얼굴값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응…?”
잘…. 뭐?
남궁비아는 당소열의 말에 방금 스쳐 간 소년의 얼굴에 대해 다시 한번 오목조목 따져봤다.
쫙 찢어진 눈매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얼굴형이다.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는 눈코입이지만 전부가 합쳐지니, 잘생겼다기보단 사납고 무섭게 생겼다는 말이 더 많이 들을 외형이었다.
확실히 못났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생겼단 말을 듣기엔 조금 무리 같았다.
남들을 흐릿하게 보고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남궁비아조차 확실히 떠올릴 이목구비였으니 말이다.
“...어휴, 역시 사람은 좀 못났어도 포근하고 착한 사람이 좋은 거 같아요.”
“...으응.”
‘하여튼 잘생긴 것들은.’ 이런저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당소열이 앞으로 나가자 남궁비아가 천천히 따라나섰다.
걷는 와중에도 남궁비아 머리에 떠다니고 있는 물음표는 사라지질 않았다.
******************
당문으로 들어오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비몽사몽 한 눈으로 문을 여니 대뜸 보기 싫은 얼굴이 둘이나 보였다.
남궁비아.
남궁천준.
파랭이 남매가 눈앞에 있었다.
...얘네는 왜 자꾸 찾아와서 지랄일까.
당문에 도착까지 했으면 그냥 모른 척 지내면 안 되는 건가.
내가 그 엿 같은 광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또 찾아왔습니까?”
남궁천준이야 제 발로 날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니, 옆에 있는 남궁비아를 보며 물었다.
딱 봐도 남궁 아들놈은 쫄래쫄래 따라왔겠지 뭘.
날 보던 남궁비아가 내 물음에 답했다.
“밥….”
“밥?”
뭔 밥…?
“밥 먹으러 가야 해요.”
“...예, 가세요.”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지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하는데?
옆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천준이 조금 답답했는지 말을 보조한다.
“당문에서 식사를 초대해주셨는데 누님께서 구 소협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 하여 여쭤보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는 됐으니 식사하러 가십쇼.”
설명을 들었으니 더 싫었다. 미쳤다고 너네랑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을까.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듯 남궁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감히 네까짓게?’라는 감정이 아주 진하게 풍겨온다.
그래봤자 순식간에 표정을 관리했지만 말이다.
“제가 입맛이 없어서요.”
“정파인들 끼리 친목도 도모할 수 있고 좋습니다. 구 소협.”
“제가 낯을 좀 많이 가려서요. 밥은 좀 편하게 먹고 싶네요.”
“낯을...가려?”
마지막 말은 남궁비아였다.
내가 째려보니 곧바로 남궁비아가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안 갑니다. 안 갈 거니까 알아서들 가서 식사하십쇼.”
당병전회는 내일 오후 즈음에 열릴 것이다.
그때까진 먹는 거야 대충 때우고 못 했던 수련이나 마저 할 생각이었다.
하물며 저것들과 껴서 밥을 먹었을 때 멀쩡한 속을 유지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계속된 거절에 가면에 조금 금이 간 듯 인상을 쓴 남궁천준이 내게 다가온다.
“그러지 마시고 같이 가시지요.”
남궁천준은 그리 말하며 내 팔을 잡았다.
그것도 꽤 강하게.
남궁비아의 시야가 닿지 않는 위치라 그런지 표정 관리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남궁천준이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격렬한 혐오감과 짜증이 들어있었다.
꽈아악.
내 팔을 잡고 있는 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가지 않겠다면 위협을 해서라도 끌고 갈 생각인가보다.
‘어쩌지.’
귀찮고 짜증 난다.
저번부터 왜 자꾸 이렇게 건드는 놈들이 많을까?
참고 살려고 하는데 자꾸 이러면, 좋지 않은데 말이야.
놈이 내게 품은 작은 살기쯤이야 이미 느끼고 있었다.
내 눈에 미친놈이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일지라도 나중에 조금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남궁의 이름도 있고 하니까 가만히 있는데, 자꾸 이러면, 들이박고 싶어지잖아.
아닌가, 그냥 죽여도 되지 않을까.
-후욱!
나도 모르게 살심을 조금 품어서 그런지, 순간 얕은 살기가 조금 빠져나갔다.
그러자 남궁천준이 놀라며 내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아, 이건 진짜 실수다.
곧바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운을 갈무리했지만, 이미 늦었는지 남궁천준은 잔뜩 커진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려진 육체 탓인지 감정도, 그로 인한 기운을 쉽게 조절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남궁비아가 서 있던 곳까진 살기가 닿지 않았는지 그녀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갸우뚱하고 있다.
나는 남궁천준을 보며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이건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권해주시니 어쩔 수 없네요 같이 가시지요.”
말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남궁천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나보다 남궁천준의 키가 더 컸기에 상당히 불편했다.
녀석은 순간 뒤로 물러난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당황하던 눈을 뒤로하고 곧장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녀석이 어깨동무를 치우려 하기에 나도 팔에 힘을 주고 조용히 속삭였다.
‘표정 관리 다시 똑바로 해, 니가 죽고 못 사는 누나가 널 보고 있잖아.’
-뿌득.
내가 남궁비아를 언급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놈의 입가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그걸 보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내 조언을 들어 먹었는지 금방 다시 원래의 미공자로 돌아왔다.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소협.”
“별말씀을요, 그렇게 부탁을 하시니까 제가 어쩔 수 없죠.”
하하하. 속뜻을 숨기고 나와 놈은 서로 웃었다.
놈이 내게 가진 살심을 오직 품고만 산다면, 딱히 나도 상관없었다.
헤어지기만 한다면 앞으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굳이 보자면 정파 모임에서 한두 번 얼굴 스치고 말겠지.
딱 그렇게만 하자.
녀석도 보는 눈이 있으니 섣불리 더는 건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남궁세가인데, 생각은 하고 살겠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이놈은 생각이란 게 없다는 것을….
이날 오후, 남궁천준이 내게 물었다.
“소협, 저와 비무를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이런 구절엽 같은 새끼.
철의 여인. (2)
찰박- 찰박-
깊게 고인 피 웅덩이를 밟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시체로 쌓인 산과 절벽은 이제는 익숙한 풍경일 뿐이다.
성한 곳이 단 한 개도 보이지 않는 썩고 부패한 시체들, 공기에 섞여 자욱하게 풍기는 냄새는 분명 지독한 독기(毒氣)였다.
멀쩡하던 대지는 독에 절여져 썩고 갈라진 땅이 되어있었다.
과연 이 넓은 대지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아마 못해도 수 세기는 걸리겠지.
걸으면서도 쉴 새 없이 몸속에 기운을 돌려 독기를 차단했다.
그리 활발하고 찬란하던 사천의 땅은 이미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피 웅덩이를 밟고 밟아 길을 뚫은 끝에는 들끓는 독기의 원주(原主)가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초록빛을 머금던 두 눈동자는 잔인하게 파내어져 핏물만 진득하니 남아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제 끝난 건가, 독비(毒妃).]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독비 당소열이 내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당신인가요.]
청량하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가래가 들끓는 지치고 지쳐버린 목소리였다.
[우스운 모습이구나, 네년의 혈족은 진작에 다른 땅으로 도망쳤거늘…. 홀로 이곳을 지킨다고 뭐가 달라질 거로 생각했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죠.]
[한데 어째서?]
내 말에 당소열이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웃는다.
[그럼 당신은 어째서 이곳에 왔나요.]
[멍청한 물음이다. 당연한 말 아닌가, 네년의 마지막 남은 숨통을 끊으러 온 것이다.]
[그렇군요.]
찰박.
천천히 당소열에게 걸어갔다. 이상한 것은 걸음을 옮길수록 독기가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당소열이 이곳에 남은 틈에 당문의 혈족은 안전하게 소림으로 가기 위한 대피 길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이후를 위한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당소열은?
[멍청한 것.]
홀로 남게 된 그녀에겐 무엇이 남아있을까.
훗날 만일 정파가 전쟁에 승리한다면, 역사에 짧게 한 줄 정도는 그어지겠지.
-독비 당소열의 희생으로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고작 그것 한 줄 남을 것이다. 참으로 부질없는 얘기다.
이틀.
다름 아닌 당소열 혼자 쏟아지는 마인들과 사투를 벌이며 사천을 지켜낸 시간이다.
당소열의 두 눈이 뽑히고 당문이 있던 땅 주위엔 지독한 독기라 쌓였다.
그 사이 셀 수 없이 많은 마인의 죽음을 만들어냈으나.
또한 고작이다.
천마가 죽지 않는 이상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녀의 앞으로 당도하니 당소열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참 미안합니다.]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마인에게 사과를? 진정 정신이 나가버렸구나. 독비.]
[예, 제가 드디어 정신을 놨나 보네요, 차라리 조금 더 일찍 놓을 걸 그랬어요……. 두 눈을 잃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네요.]
[헛소리는 거기까지다. 남길 말은 그뿐인가.]
나는 천천히 그녀의 목을 손으로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만큼 얇은 목이었다.
[주제에 할 수 있는 바람이 아니지만,
부디 세상에 남은 시간이 있다면.]
파르르 떨리는 몸, 나는 그녀가 무슨 감정을 품고서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은 이의 푸념, 이제야 겪는 희생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을까.
그 어떤 것도 내가 관심을 둘 일은 아니었다.
[당신이…….]
당소열은 말을 이었지만,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뭐라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어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당소열이 고개를 푹 숙인다.
손을 떼고 몸을 비키니 당소열의 몸이 힘없이 땅으로 쓰러진다.
주위 핏물은 모두 독기에 침식되어있다.
아무리 만독불침이라 한들 숨이 끊어져 내기가 빠져나간 육신은 금방 썩고 녹아내릴 것이다.
고된 희생을 끝냈으나 육신의 한 조각조차 남기지 못하겠지.
희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 사천 땅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뗐다.
주위 독기 탓일까, 이곳에 서 있는 게 너무 역겨울 지경이었다.
이 땅도.
나 자신도.
******************
“대답하지 않으실 겁니까.”
상념이 끝났다.
이럴 때만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너무 잘 나는 게 싫었다. 나는 당소열의 눈과 마주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독불침의 영향으로 한쪽 눈만 초록빛이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양쪽 눈이 다 녹색으로 물들 것이다.
독비 당소열, 아니 지금은 독봉(毒鳳)이려나.
“대답하지 않겠다면 사람을….”
당소열이 말하려는데 남궁비아가 옆에서 뭐라 속삭인다.
남궁비아의 말에 당소열이 찌푸리던 인상을 풀었다.
이거 내게 한 발짝 가까이 오더니 예를 차린다.
“당문의 당소열이라고 합니다. 본가를 찾아주신 손님께 과하게 언성을 높인 점 사과드립니다.”
망설임 없는 빠른 판단이었다.
“...구절엽이라고 합니다.”
나도 대답했으나 역시 구절엽의 이름을 빌려 썼다.
이걸 빨리 관두든가 해야지…. 아 그냥 지금이라도 깔까?
내가 조금이라도 유명했으면 안 통했을 방법인데 내 이름에 관해서는 왜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을까.
당장 1년만 지나있었어도 내 이름만 말하면 산서의 개새끼라고 정평이 나 있었을 텐데.
격렬한 고민을 하는 와중에 당소열이 말했다.
“그렇군요. 구 공자님, 이곳은 본문의 사람이 아닌 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옆에 남궁 소저 또한 외인 아닙니까?”
“혈족이 허락했으니 괜찮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너는 허락한 적 없으니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치사하네 진짜….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게다가 당소열의 날카로운 눈빛이 계속 쏟아지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왜 날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까? 여길 들어온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얘길 끝내고 위설아와 함께 발길을 돌렸다.
떠난 뒤 남궁비아는 옆에 당소열을 보며 물었다.
“소열.”
“네 언니.”
“왜 그렇게 무섭게 째려봤어?”
“...잘못 들어왔다고 지적하니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요.”
“아….”
“지 잘생기면 단가? 하여튼 얼굴값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응…?”
잘…. 뭐?
남궁비아는 당소열의 말에 방금 스쳐 간 소년의 얼굴에 대해 다시 한번 오목조목 따져봤다.
쫙 찢어진 눈매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얼굴형이다.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는 눈코입이지만 전부가 합쳐지니, 잘생겼다기보단 사납고 무섭게 생겼다는 말이 더 많이 들을 외형이었다.
확실히 못났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생겼단 말을 듣기엔 조금 무리 같았다.
남들을 흐릿하게 보고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남궁비아조차 확실히 떠올릴 이목구비였으니 말이다.
“...어휴, 역시 사람은 좀 못났어도 포근하고 착한 사람이 좋은 거 같아요.”
“...으응.”
‘하여튼 잘생긴 것들은.’ 이런저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당소열이 앞으로 나가자 남궁비아가 천천히 따라나섰다.
걷는 와중에도 남궁비아 머리에 떠다니고 있는 물음표는 사라지질 않았다.
******************
당문으로 들어오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비몽사몽 한 눈으로 문을 여니 대뜸 보기 싫은 얼굴이 둘이나 보였다.
남궁비아.
남궁천준.
파랭이 남매가 눈앞에 있었다.
...얘네는 왜 자꾸 찾아와서 지랄일까.
당문에 도착까지 했으면 그냥 모른 척 지내면 안 되는 건가.
내가 그 엿 같은 광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 또 찾아왔습니까?”
남궁천준이야 제 발로 날 찾아왔을 리는 없을 테니, 옆에 있는 남궁비아를 보며 물었다.
딱 봐도 남궁 아들놈은 쫄래쫄래 따라왔겠지 뭘.
날 보던 남궁비아가 내 물음에 답했다.
“밥….”
“밥?”
뭔 밥…?
“밥 먹으러 가야 해요.”
“...예, 가세요.”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지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하는데?
옆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천준이 조금 답답했는지 말을 보조한다.
“당문에서 식사를 초대해주셨는데 누님께서 구 소협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 하여 여쭤보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는 됐으니 식사하러 가십쇼.”
설명을 들었으니 더 싫었다. 미쳤다고 너네랑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을까.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듯 남궁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감히 네까짓게?’라는 감정이 아주 진하게 풍겨온다.
그래봤자 순식간에 표정을 관리했지만 말이다.
“제가 입맛이 없어서요.”
“정파인들 끼리 친목도 도모할 수 있고 좋습니다. 구 소협.”
“제가 낯을 좀 많이 가려서요. 밥은 좀 편하게 먹고 싶네요.”
“낯을...가려?”
마지막 말은 남궁비아였다.
내가 째려보니 곧바로 남궁비아가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안 갑니다. 안 갈 거니까 알아서들 가서 식사하십쇼.”
당병전회는 내일 오후 즈음에 열릴 것이다.
그때까진 먹는 거야 대충 때우고 못 했던 수련이나 마저 할 생각이었다.
하물며 저것들과 껴서 밥을 먹었을 때 멀쩡한 속을 유지할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계속된 거절에 가면에 조금 금이 간 듯 인상을 쓴 남궁천준이 내게 다가온다.
“그러지 마시고 같이 가시지요.”
남궁천준은 그리 말하며 내 팔을 잡았다.
그것도 꽤 강하게.
남궁비아의 시야가 닿지 않는 위치라 그런지 표정 관리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남궁천준이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격렬한 혐오감과 짜증이 들어있었다.
꽈아악.
내 팔을 잡고 있는 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가지 않겠다면 위협을 해서라도 끌고 갈 생각인가보다.
‘어쩌지.’
귀찮고 짜증 난다.
저번부터 왜 자꾸 이렇게 건드는 놈들이 많을까?
참고 살려고 하는데 자꾸 이러면, 좋지 않은데 말이야.
놈이 내게 품은 작은 살기쯤이야 이미 느끼고 있었다.
내 눈에 미친놈이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일지라도 나중에 조금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남궁의 이름도 있고 하니까 가만히 있는데, 자꾸 이러면, 들이박고 싶어지잖아.
아닌가, 그냥 죽여도 되지 않을까.
-후욱!
나도 모르게 살심을 조금 품어서 그런지, 순간 얕은 살기가 조금 빠져나갔다.
그러자 남궁천준이 놀라며 내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아, 이건 진짜 실수다.
곧바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운을 갈무리했지만, 이미 늦었는지 남궁천준은 잔뜩 커진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어려진 육체 탓인지 감정도, 그로 인한 기운을 쉽게 조절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남궁비아가 서 있던 곳까진 살기가 닿지 않았는지 그녀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갸우뚱하고 있다.
나는 남궁천준을 보며 어색하게 씨익 웃었다. 이건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권해주시니 어쩔 수 없네요 같이 가시지요.”
말을 꺼내며 자연스럽게 남궁천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나보다 남궁천준의 키가 더 컸기에 상당히 불편했다.
녀석은 순간 뒤로 물러난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당황하던 눈을 뒤로하고 곧장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녀석이 어깨동무를 치우려 하기에 나도 팔에 힘을 주고 조용히 속삭였다.
‘표정 관리 다시 똑바로 해, 니가 죽고 못 사는 누나가 널 보고 있잖아.’
-뿌득.
내가 남궁비아를 언급한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놈의 입가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그걸 보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내 조언을 들어 먹었는지 금방 다시 원래의 미공자로 돌아왔다.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소협.”
“별말씀을요, 그렇게 부탁을 하시니까 제가 어쩔 수 없죠.”
하하하. 속뜻을 숨기고 나와 놈은 서로 웃었다.
놈이 내게 가진 살심을 오직 품고만 산다면, 딱히 나도 상관없었다.
헤어지기만 한다면 앞으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굳이 보자면 정파 모임에서 한두 번 얼굴 스치고 말겠지.
딱 그렇게만 하자.
녀석도 보는 눈이 있으니 섣불리 더는 건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남궁세가인데, 생각은 하고 살겠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나는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이놈은 생각이란 게 없다는 것을….
이날 오후, 남궁천준이 내게 물었다.
“소협, 저와 비무를 한 번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이런 구절엽 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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