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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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구가의 소공자(2)
구가의 소공자. 2
산서의 구가라 하면 나름 이름 높은 명가 취급을 받는다.
비록 사대세가라 불리는
안휘의 남궁세가(南宮世家).
하북의 하북팽가(河北彭家).
사천의 사천당문(四川唐門).
요령의 모용세가(慕容世家).
등과 비교하자면 산서의 구가는 몇 걸음 떨어져 있다 하지만.
구가는 분명 그 못지않은 명가가 되리라 믿는 이들이 많다.
현 가주인 호협(虎俠) 구철운은 무려 중원 백대고수 중의 한 명.
심지어 그중에서도 강한 축에 뽑히는 무인이었고.
그가 정파인으로서 가지는 신념과 협의심은 많은 이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구가 소속의 무인들은 양민들을 핍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들을 막아내고 물리친다.
괜히 그들을 보고 산서의 수호자라 부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세가의 위세, 양민들의 호의 어린 지지는 물론 구철운의 자식들 또한 이미 후기지수 중에서도 무인으로서 뛰어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첫째인 딸 구희비는 세대의 대표를 나타내는 후기지수임을 입증하듯 이미 많은 이들에게 검봉(劍鳳)이라 불리고 있으며.
둘째 딸인 구연서 또한 구희비 못지않은 재능을 보이며 훗날 구희비 별호를 어렵지 않게 이어받으리라 예상했다.
대대로 이어온 정파 명가이자 가주는 물론, 대를 이어 핏줄들까지 고강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구가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 지리라.
많은 이들이 얼마 가지 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나 또한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구가의 유일한 아들이자 소가주가 마인으로 변절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련님.
아침을 알리는 사용인의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 보니 어느덧 햇빛이 창밖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있어.”
조금 쉬어버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애초에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도저히 잠이 오질 않더라.
후.
조용히 한숨을 한 번 내고선 마른 세수를 했다.
“...진짜 꿈이 아니란 말이지.”
어느덧 3일째다.
심장이 터져 죽은 내가 어린 시절로 회귀한 지 말이다.
“진짜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허공에 대고 물어봐도 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백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첫날은 그저 공허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꿈꾸고 있으니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밥도 먹고 잠까지 잤다.
밥을 먹고 맛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근데도 그저 멍청하게 멍하니 이틀째를 보냈다.
“등신 같은 놈.”
삼 일째가 되어서야 깨닫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고갤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꿉꿉했던 무림맹 지하 고문실의 철창이 아닌 환하게 열린 창밖으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둔감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 끝나고 상황을 인식하니 환희로 인해 몸에 열이 조금씩 오른다.
망가지고 망가져 나락까지 내려간 삶에서 가장 행복했을 시기로 돌아왔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진 모르겠지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아니, 현실이어야 해.“
부디 그래야 했다.
혹시 아니지 않을까 하는 불신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현실감으로 간신히 억눌렀다.
과거로 온 게 맞다면 나는 지금부터 무얼 해야 하지. 어디부터 생각해야 할까.
앞으로 시작될 무수한 사건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을 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도련님.
그 탓에 애써 가지고 있던 상념이 깨져버렸다.
-조금 있으면 가주님이 세가에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사용인의 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며칠째 머릿속이 포화상태라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오신다고….”
아마 일 때문에 세가를 비웠을 아버지가 세가로 돌아오신단다. 며칠을 비웠을지 모르나 내겐 전생을 포함해 몇 년 만의 보는 것이었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에 대한 감상은 그리움이나 반가움보단 공포감에 더 가까웠다.
전생에 느꼈던 나를 보던 싸늘한 눈빛과 날카로운 말들은 여전히 가슴에 사무쳐 있었다.
아직도 깊숙이 스며든 말은 틈만 나면 생각나 머릿속을 괴롭혔다.
‘망나니 같은 놈, 대체 언제까지 그리 살 생각이지? 끝내 가문의 수치로 남을 생각이냐.’
약관이 될 무렵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다. 원망은 하지 않는다. 나는 저런 소릴 듣고도 남을 만큼 하찮게 살았으니.
그럴 수 있었다. 이해하지만 당시의 보았던 모든 순간은 마음속에 갈무리 되어 품고 살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다.
-도련님?
내가 대답이 없자 밖에서 사용인이 한 번 더 나를 불렀다.
“준비하고 나갈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한, 한 식경(약 30분) 뒤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세안해야 하니 그것만 좀 준비해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용인의 당황한 목소리가 느껴진다. 예상과 다르게 내가 준비하겠다. 말하니 당황한 것이겠지.
어릴 적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침에 깨운 것이 마음에 안 든다며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던지고 난동을 피워댔다.
내가 깨부순 집안 물품이 몇 갠지 셀 수조차 없었다.
되지도 않는 변명을 일삼으며 억지를 부린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버지를 보기 껄끄럽단 이유여서였겠지.
지금도 껄끄럽긴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와서까지 도망칠 이유나 여유가 있진 않았다.
사용인이 준비해준 세안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몸을 단정히 했다.
준비를 돕던 사용인이 계속 손을 덜덜 떠는 게 조금 신경 쓰였다. 혹여 내가 무언가 던지거나 들고 휘두를까 두려워하는 건가?
열 몇 살짜리 애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마는…….
‘...그랬던 적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차마 더 생각할 수 없었다.
준비를 끝마치고 문밖을 나서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느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여실히 들려왔다.
-어쩐 일로 가주님 마중을 다 나가지?
-그렇게 일어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시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잘도 들렸다.
그 전쟁 급 난동을 겨우 투정이라고 표현하다니 사람들이 참 착했다.
말하는 도중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으려 들기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과거의 나였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음….
‘생각하지 말자….’
지랄 지랄을 다 했겠지 뭘.
아마 저 둘은 다음날부터 세가에서 못 보는 얼굴이 되지 않았을까.
걷는 와중에 꽃이 화사히 피어난 게 눈에 보인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관 다르게 계절은 편안한 봄이었다.
죽기 직전 무림맹의 계절은 겨울이었나 가을이었나.
사계 중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우 계절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는지, 아니면 그냥 멍청하게 꽃이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후자겠지.”
“네?”
회귀 첫날과 같이 날 안내해주는 호위가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각 정도를 걸으니 장원을 지나 화원을 거쳐 구가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대부분이 며칠 동안 본 적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대다수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상황을 겪는 게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많은 이들을 지나 앞으로 나서니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도달했다.
그들 중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신기하네 네가 나올 줄 몰랐어.”
말을 건 것은 긴 장발을 뒤로 질끈 묶은 소녀였다.
소녀의 나이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약관이 되지 않은 듯했다.
어딜 가도 미인이라 소릴 들을 것이 분명했으나 곧은 눈동자와 서 있는 자세로부터 조금씩 무인의 모습이 엿보였다.
구가에서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이 나이대에 소녀라면 사실상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홍염검 구연서.
소녀는 구가의 혈족이자 자신의 연년생 누이였다.
구연서는 아마 지금쯤이라면 촉망받는 후기지수일 것이고, 훗날엔 뛰어난 여검수로 명성을 떨칠 것이다.
미래에도 그랬으니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와야 할 자리니까.”
내 대답에 구연서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아는 애가 지금까지 얼굴도 비추질 않았던 거니?”
구연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질책했다. 맞는 말이었다.
구연서의 말대로 나는 구가의 혈족으로서 분명 나왔어야 할 자리를 자기감정만 앞세워 도망치기만 했으니까.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뭐?”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나중에 가주님에게도 사과드릴게.”
또박또박 뱉은 사과에 구연서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구연선는 혀를 짧게 차고 말했다.
“이번엔 대체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 가지고 장난칠 거면 여기까지 하면 좋겠어. 이제는 정말 화가 날 것 같으니까.”
말을 쏘아붙이곤 고개를 휙 돌렸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뭐라 한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었지만, 그조차 쉽게 되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도착하십니다.”
사용인의 말에 따라 입구로 시선을 옮기니 멀리서 마차 하나가 정문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다른 말과 비교해서 두 배는 커 보이는 적토마는 쉼 없이 달려 짧은 시간에 구가의 정문을 넘어 사람들에게 도착했다.
한참을 달려왔을 적토마가 제자리에 멈춰 숨을 몰아쉬는 사이 마차의 문을 열며 사람이 내려온다.
구가의 상징과 같은 붉은 도포를 입고 얼굴의 반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흉터를 지닌 중년인.
매서운 눈매는 뒤로하고 모인 이들을 흩어보는 붉은색 눈동자에 많은 이들이 감히 고갤 들지 못한다.
‘...아버지.’
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산서구가의 가주 호협 구철운이었다.
셀 수없이 많은 무인 사이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다는 초인이 그곳에 있었다.
빠르게 시선을 훑던 아버지의 눈이 내게서 멈추었다.
나 또한 피하지 않고 아버지와 시선을 교환했다.
저 매서운 눈이 어릴때는 그렇게 무서웠다.
그러길 아주 찰나, 아버지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가주님. 아무 탈 없이 복귀하셔서 다행입니다.”
“총관.”
“예, 가주님.”
“지금 정비 중인 검대가 있나?”
“일검대는 복귀 후 휴식 중, 사검대가 현재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럼 사검대주는 자시가 지나기 전까지 준비를 끝내고 날 찾아오라 전하게.”
“알겠습니다.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짧은 대화를 끝으로 가주가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니 모든 이들이 가주를 따라 걷는다.
나 또한 아버지의 등을 보며 걸었다. 아버지의 등은 여전히 크고 무겁기만 했다.
돌아온 것은 기적과 같았으나 꼬이고 엉킨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너무 늦은 시기가 아니라 다행이야.’
지금부터 몇 년이라도 미래로 회귀했다면 그건 정말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이 늦어버렸겠지.
이건 분명 행운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조차도 어디서부터 뭘 풀어가야 할지 아직은 어렵기만 했다.
우뚝.
일정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아버지의 발이 멈췄다.
“셋째는 식사가 끝난 뒤 따로 가주실로 오도록.”
말을 꺼내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는다. 당황스럽다.
셋째는 분명 나를 부르는 명칭이다.
나를 왜? 왜지? 아버지가 나를 따로 부를 만한 일이….
‘...너무 많아서 전혀 예상이 안 가는데?’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이어지자 아버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있을 저녁 식사, 그때까지 우선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정했다. 회귀 후 처음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무연.”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호위의 이름을 속삭였다.
“예, 도련님.”
“...밥 먹기 전에 의원한테 좀 안내해줘.”
내가 의원한테 가자 하니 무연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어,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니, 지금 밥 먹으면 분명 체할 거 같아서 미리 소화제 좀 챙기려고.”
“아…….”
구가의 소공자. 2
산서의 구가라 하면 나름 이름 높은 명가 취급을 받는다.
비록 사대세가라 불리는
안휘의 남궁세가(南宮世家).
하북의 하북팽가(河北彭家).
사천의 사천당문(四川唐門).
요령의 모용세가(慕容世家).
등과 비교하자면 산서의 구가는 몇 걸음 떨어져 있다 하지만.
구가는 분명 그 못지않은 명가가 되리라 믿는 이들이 많다.
현 가주인 호협(虎俠) 구철운은 무려 중원 백대고수 중의 한 명.
심지어 그중에서도 강한 축에 뽑히는 무인이었고.
그가 정파인으로서 가지는 신념과 협의심은 많은 이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구가 소속의 무인들은 양민들을 핍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들을 막아내고 물리친다.
괜히 그들을 보고 산서의 수호자라 부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세가의 위세, 양민들의 호의 어린 지지는 물론 구철운의 자식들 또한 이미 후기지수 중에서도 무인으로서 뛰어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첫째인 딸 구희비는 세대의 대표를 나타내는 후기지수임을 입증하듯 이미 많은 이들에게 검봉(劍鳳)이라 불리고 있으며.
둘째 딸인 구연서 또한 구희비 못지않은 재능을 보이며 훗날 구희비 별호를 어렵지 않게 이어받으리라 예상했다.
대대로 이어온 정파 명가이자 가주는 물론, 대를 이어 핏줄들까지 고강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구가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 지리라.
많은 이들이 얼마 가지 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나 또한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구가의 유일한 아들이자 소가주가 마인으로 변절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도련님.
아침을 알리는 사용인의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 보니 어느덧 햇빛이 창밖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어나있어.”
조금 쉬어버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애초에 밤새 한숨도 못 잤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서 도저히 잠이 오질 않더라.
후.
조용히 한숨을 한 번 내고선 마른 세수를 했다.
“...진짜 꿈이 아니란 말이지.”
어느덧 3일째다.
심장이 터져 죽은 내가 어린 시절로 회귀한 지 말이다.
“진짜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허공에 대고 물어봐도 답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백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첫날은 그저 공허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꿈꾸고 있으니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밥도 먹고 잠까지 잤다.
밥을 먹고 맛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근데도 그저 멍청하게 멍하니 이틀째를 보냈다.
“등신 같은 놈.”
삼 일째가 되어서야 깨닫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고갤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꿉꿉했던 무림맹 지하 고문실의 철창이 아닌 환하게 열린 창밖으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둔감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 끝나고 상황을 인식하니 환희로 인해 몸에 열이 조금씩 오른다.
망가지고 망가져 나락까지 내려간 삶에서 가장 행복했을 시기로 돌아왔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진 모르겠지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아니, 현실이어야 해.“
부디 그래야 했다.
혹시 아니지 않을까 하는 불신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현실감으로 간신히 억눌렀다.
과거로 온 게 맞다면 나는 지금부터 무얼 해야 하지. 어디부터 생각해야 할까.
앞으로 시작될 무수한 사건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고 있을 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도련님.
그 탓에 애써 가지고 있던 상념이 깨져버렸다.
-조금 있으면 가주님이 세가에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사용인의 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며칠째 머릿속이 포화상태라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오신다고….”
아마 일 때문에 세가를 비웠을 아버지가 세가로 돌아오신단다. 며칠을 비웠을지 모르나 내겐 전생을 포함해 몇 년 만의 보는 것이었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에 대한 감상은 그리움이나 반가움보단 공포감에 더 가까웠다.
전생에 느꼈던 나를 보던 싸늘한 눈빛과 날카로운 말들은 여전히 가슴에 사무쳐 있었다.
아직도 깊숙이 스며든 말은 틈만 나면 생각나 머릿속을 괴롭혔다.
‘망나니 같은 놈, 대체 언제까지 그리 살 생각이지? 끝내 가문의 수치로 남을 생각이냐.’
약관이 될 무렵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다. 원망은 하지 않는다. 나는 저런 소릴 듣고도 남을 만큼 하찮게 살았으니.
그럴 수 있었다. 이해하지만 당시의 보았던 모든 순간은 마음속에 갈무리 되어 품고 살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다.
-도련님?
내가 대답이 없자 밖에서 사용인이 한 번 더 나를 불렀다.
“준비하고 나갈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한, 한 식경(약 30분) 뒤에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세안해야 하니 그것만 좀 준비해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용인의 당황한 목소리가 느껴진다. 예상과 다르게 내가 준비하겠다. 말하니 당황한 것이겠지.
어릴 적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침에 깨운 것이 마음에 안 든다며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던지고 난동을 피워댔다.
내가 깨부순 집안 물품이 몇 갠지 셀 수조차 없었다.
되지도 않는 변명을 일삼으며 억지를 부린 이유는 다름 아닌 아버지를 보기 껄끄럽단 이유여서였겠지.
지금도 껄끄럽긴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와서까지 도망칠 이유나 여유가 있진 않았다.
사용인이 준비해준 세안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몸을 단정히 했다.
준비를 돕던 사용인이 계속 손을 덜덜 떠는 게 조금 신경 쓰였다. 혹여 내가 무언가 던지거나 들고 휘두를까 두려워하는 건가?
열 몇 살짜리 애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마는…….
‘...그랬던 적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차마 더 생각할 수 없었다.
준비를 끝마치고 문밖을 나서자 많은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을 느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여실히 들려왔다.
-어쩐 일로 가주님 마중을 다 나가지?
-그렇게 일어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시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잘도 들렸다.
그 전쟁 급 난동을 겨우 투정이라고 표현하다니 사람들이 참 착했다.
말하는 도중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으려 들기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과거의 나였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음….
‘생각하지 말자….’
지랄 지랄을 다 했겠지 뭘.
아마 저 둘은 다음날부터 세가에서 못 보는 얼굴이 되지 않았을까.
걷는 와중에 꽃이 화사히 피어난 게 눈에 보인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 마음관 다르게 계절은 편안한 봄이었다.
죽기 직전 무림맹의 계절은 겨울이었나 가을이었나.
사계 중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겨우 계절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는지, 아니면 그냥 멍청하게 꽃이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후자겠지.”
“네?”
회귀 첫날과 같이 날 안내해주는 호위가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각 정도를 걸으니 장원을 지나 화원을 거쳐 구가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대부분이 며칠 동안 본 적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들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대다수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상황을 겪는 게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많은 이들을 지나 앞으로 나서니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도달했다.
그들 중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신기하네 네가 나올 줄 몰랐어.”
말을 건 것은 긴 장발을 뒤로 질끈 묶은 소녀였다.
소녀의 나이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약관이 되지 않은 듯했다.
어딜 가도 미인이라 소릴 들을 것이 분명했으나 곧은 눈동자와 서 있는 자세로부터 조금씩 무인의 모습이 엿보였다.
구가에서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이 나이대에 소녀라면 사실상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홍염검 구연서.
소녀는 구가의 혈족이자 자신의 연년생 누이였다.
구연서는 아마 지금쯤이라면 촉망받는 후기지수일 것이고, 훗날엔 뛰어난 여검수로 명성을 떨칠 것이다.
미래에도 그랬으니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와야 할 자리니까.”
내 대답에 구연서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아는 애가 지금까지 얼굴도 비추질 않았던 거니?”
구연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질책했다. 맞는 말이었다.
구연서의 말대로 나는 구가의 혈족으로서 분명 나왔어야 할 자리를 자기감정만 앞세워 도망치기만 했으니까.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뭐?”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나중에 가주님에게도 사과드릴게.”
또박또박 뱉은 사과에 구연서는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구연선는 혀를 짧게 차고 말했다.
“이번엔 대체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 가지고 장난칠 거면 여기까지 하면 좋겠어. 이제는 정말 화가 날 것 같으니까.”
말을 쏘아붙이곤 고개를 휙 돌렸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뭐라 한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었지만, 그조차 쉽게 되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도착하십니다.”
사용인의 말에 따라 입구로 시선을 옮기니 멀리서 마차 하나가 정문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다른 말과 비교해서 두 배는 커 보이는 적토마는 쉼 없이 달려 짧은 시간에 구가의 정문을 넘어 사람들에게 도착했다.
한참을 달려왔을 적토마가 제자리에 멈춰 숨을 몰아쉬는 사이 마차의 문을 열며 사람이 내려온다.
구가의 상징과 같은 붉은 도포를 입고 얼굴의 반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흉터를 지닌 중년인.
매서운 눈매는 뒤로하고 모인 이들을 흩어보는 붉은색 눈동자에 많은 이들이 감히 고갤 들지 못한다.
‘...아버지.’
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산서구가의 가주 호협 구철운이었다.
셀 수없이 많은 무인 사이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다는 초인이 그곳에 있었다.
빠르게 시선을 훑던 아버지의 눈이 내게서 멈추었다.
나 또한 피하지 않고 아버지와 시선을 교환했다.
저 매서운 눈이 어릴때는 그렇게 무서웠다.
그러길 아주 찰나, 아버지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가주님. 아무 탈 없이 복귀하셔서 다행입니다.”
“총관.”
“예, 가주님.”
“지금 정비 중인 검대가 있나?”
“일검대는 복귀 후 휴식 중, 사검대가 현재 대기 중에 있습니다.”
“그럼 사검대주는 자시가 지나기 전까지 준비를 끝내고 날 찾아오라 전하게.”
“알겠습니다.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짧은 대화를 끝으로 가주가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니 모든 이들이 가주를 따라 걷는다.
나 또한 아버지의 등을 보며 걸었다. 아버지의 등은 여전히 크고 무겁기만 했다.
돌아온 것은 기적과 같았으나 꼬이고 엉킨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너무 늦은 시기가 아니라 다행이야.’
지금부터 몇 년이라도 미래로 회귀했다면 그건 정말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이 늦어버렸겠지.
이건 분명 행운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조차도 어디서부터 뭘 풀어가야 할지 아직은 어렵기만 했다.
우뚝.
일정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아버지의 발이 멈췄다.
“셋째는 식사가 끝난 뒤 따로 가주실로 오도록.”
말을 꺼내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는다. 당황스럽다.
셋째는 분명 나를 부르는 명칭이다.
나를 왜? 왜지? 아버지가 나를 따로 부를 만한 일이….
‘...너무 많아서 전혀 예상이 안 가는데?’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이어지자 아버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있을 저녁 식사, 그때까지 우선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정했다. 회귀 후 처음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무연.”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호위의 이름을 속삭였다.
“예, 도련님.”
“...밥 먹기 전에 의원한테 좀 안내해줘.”
내가 의원한테 가자 하니 무연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어,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니, 지금 밥 먹으면 분명 체할 거 같아서 미리 소화제 좀 챙기려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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