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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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악몽 (1)
악몽 (1)
주위가 어두컴컴하다.
밤이라기엔 이질적이고 아니라기엔 모순적이다. 달이 떠 있는지 확인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도 하늘도 분명 있어야 할 것들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주위의 나무란 나무는 죄다 불타있었고 전각이 세워져 있었을 자리엔 다 타버려 잿불만 남아 있었다.
천천히 몸이 움직인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몸의 소유권을 찾아보려 하지만 들어먹질 않는다.
한 발짝 띄려는데 누군가 발목을 잡는 게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피투성이의 사내가 보인다.
흰옷에 매화 문양. 중원에 너무나 잘 알려진 문파의 무복이다.
화산파(華山派).
그래, 이곳은 화산이구나.
화사히 피웠을 꽃들이 모두 불타 원래의 모습이 사라졌으나, 여러 세기 동안 자리 잡아 섬서를 지켜왔을 명문.
그 모든 역사가 지금은 사라졌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꿈이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
[어찌 이러셨소…!]
사내가 내게 말했다. 얼굴에 담긴 억울함과 원망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잘려나간 팔을 두고 남은 왼팔로 꾸역꾸역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핏줄이 터져 붉게 보이는 눈은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다고…!! 어찌 우리에게 이러는 것이오!!]
핏줄이 터져라 소리치는 목소리. 주위엔 사내와 같은 무복을 입은 이들의 주검들이 널려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의 인물까지 구별하지 않은 체 모두가 숨이 멎은 상태였다.
그것도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당신이 정녕 인간이 맞소…? 어찌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이오!]
침묵을 지키던 몸이 입을 열었다. 이 또한 내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들리던 소리가 멈췄다.]
[뭐…?]
[너희가 온 힘을 바쳐 존경하던 매화선(梅華仙)이 교주님께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개소리! 장문인이 고작 그딴 악귀에게……!]
[그토록 아끼던 화산이 잿불이 되었거늘, 아직도 알지 못하는 건가.]
입 닥쳐 제발…. 입 닥치라고.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명문이라 이름을 붙이기엔 역겨울 만큼 초라하구나.]
서서히 무릎을 굽혀 사내와 시선을 가까이한다. 사내의 눈에 담긴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분명 그건 두려움이었다.
[보아라, 네가 그리 아끼던 사제들은 내 손에 죽고, 너를 그리 아끼던 사형들 또한 내 손에 죽었다.]
핏물이 가득한 손으로 사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사형제들의 피가 묻은 손이었다.
끄드드득.
사내의 입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이가 부서지는 것 같다.
[화산이 불탄 것도, 네놈이 이리된 것도 전부 나약하고 무능해서 그렇다. 화산도 네놈도, 매화선도.]
[입 닥쳐라 마귀…! 정파를 배반하고 등에 칼을 꽂은 네깟 놈의 입에 오를 이름이…!]
나는 더 이상의 잡담은 없다는 듯 사내의 목을 잡아 꺾었다.
화산의 마지막 남은 문도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찰박.
넓게 깔린 피 웅덩이 사이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인기척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시선은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가진 존재감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이른다.
섬서의 태산과 같던 화산은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숨겼다.
가까이 마주하는 것만으로 모든 감각이 위험 신호를 보낸다.
천마(天魔).
그는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나쁘지 않구나.]
소리가 들림에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남성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여성의 목소리인가.
굵은 듯하면서도 여성처럼 얇은 음색으로 들리기도 했다.
천마가 툭 하니 내 앞에 무언갈 던졌다.
마치 잡아 뜯은 듯한 노인의 목.
이는 다름 아닌 화산의 절대 고수라 불리던 매화선의 목이었다.
[본좌를 기쁘게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나, 얕은 즐거움까진 얻어갈 수 있었다.]
중원 삼존자는 아닐지라도 그와 동급으로 보던 고수가 이리 쉽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전투가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인 듯 평온한 모습의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앞으로 다가온다.
[마치 짐승이 날뛴 것 같구나.]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네게 붙여줄 이름은 본좌가 고민할 필요가 없겠어.]
깨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지?
[너는….]
천마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
“련님…!”
[...지금부터.]
“도련님!”
위설아의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
나는 구룡회를 마치고 구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웨에에엑!”
꿈에서 깨자마자 다급히 마차를 세워 뛰쳐나갔다.
부글거리는 것을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땅에 주저앉아 토악질을 뱉어냈다.
오늘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 끝도 없이 쏟아졌다.
‘시발…. 시발!’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꿈을 꾸게 됐지.
애써 잊은 척 살던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을 뜯어내 버리고 싶을 만큼.
내 등에 손길이 느껴진다. 휙 돌아 잡아챘다.
떨리는 손으로 잡고 보니 위설아의 손이었다.
위설아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꿈속의 사내가 내게 보이던 두려움과 겹쳐 보였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떻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엉망일 것이다.
쉽사리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우선 주고 있던 손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위설아는 겁먹은 표정을 숨기고 오히려 차분하게 내 등을 다시 토닥인다.
마차를 호위하던 무연 또한 다급히 뛰어왔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당장 의원을…!”
“괜찮으니까 진정해…. 여기서 의원을 어떻게 구해.”
아직은 세가로 돌아가는 산골이다. 근처에 의원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지만, 쉽사리 진정 되진 않는다.
화산파가 마교의 손에 멸문 당하던 날의 기억.
구파일방의 검문이 고작 하루 만에 무너졌던 날이다.
잊고싶던 일이었으나, 고작 꿈으로 마주했다고 이 꼴이 나다니.
‘...없었던 일이야,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이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뇌는 말이다.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하물며 숨을 쉴 때조차 되뇌는 생각이었다.
“....시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죄업은 한 번 죽어서도 결국 잊지를 못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진정되지 않자 결국 몸에 내공을 둘러 강제로 진정시켰다.
효율이 좋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빨리 출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구염화륜공을 돌리니 몸속이 따뜻해진다.
안 그래도 쥐뿔도 없는 내공인데 악몽 꿔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겠다고 쓰고 있으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진짜 개같은 기분이야..”
조금 진정이 됐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위설아가 부축해주려 하지만 애써 괜찮다며 살짝 밀어냈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걸까.
과거로 돌아왔어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탓일까.
‘신경 쓰지 말자, 그냥 악몽일 뿐이야.’
한 움큼 게워내고 났더니 그래도 정신이 좀 맑아진 느낌이었다.
꼬인 속은 가면서 심법으로 풀든 좀 더 쉬면서 풀든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 내기로 인해 발달한 오감에 뭔가 느껴졌다. 등골을 콕콕 찌르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에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재수도 없지.’
꿈자리도 사나운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리 액땜을 하는 것일까.
마차로 올라가려던 몸을 돌려 무연에게 다가갔다.
나는 다급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무연에게 말했다.
“무연.”
“예, 도련님…! 역시 의원을 한 번 찾아볼까요?”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고 얼른 마선부(魔線符)의 상태 좀 확인해봐.”
무연이 내 말에 싸늘한 느낌이 들었는지 재빨리 품 안에 부적 한 장을 꺼내 든다.
마선부는 과거 무당에서 개발한 부적으로 내기를 불어넣어 두면 근처 마경문이 나타날 시 신호가 나타나는 물건이었다.
품에서 꺼내든 부적은 아무런 신호도 나타내지 않고 멀쩡한 상태였다.
무연은 아무 일도 없는 부적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도련님, 갑자기 진지하게 그런 말씀 하시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무연이 말을 잇던 도중 부적이 붉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망설임은 없었다. 무연이 곧바로 주위를 호위하던 무인들에게 소리쳤다.
“마경문 발생! 전원 전투준비!”
무연이 소리치자마자 곧바로 주위 호위들이 검을 뽑아 든다. 혼란스럽던 분위기에 긴장감이 겹쳐진다.
하필 돌아가는 길에 일이 터지다니. 저리 급히 마선부가 불탔다는 것은 마경문의 위치가 매우 가깝다는 의미였다.
조금만 더 멀었다면 도주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중간에 마차를 멈춰 세운 내 탓이었다.
무연이 다급히 내 어깨를 잡는다.
“도련님 위험하니 우선, 마차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나는 무연의 말에 곧바로 마차 안으로 위설아와 다른 시종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곤 문을 닫고 무연의 옆에 섰다.
“도련님도 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입니다….”
평소였다면 그냥 마차 안에 박혀서 지나가길 기다렸을 테지만, 내 탓에 이리된 것이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사고를 안 쳤으면 모를까, 이번 삶에 내가 싼 똥은 스스로 치우며 살기로 했다.
그래야 전과 같은 일이 안 벌어질 것이다.
“도련…!”
“무연, 잔소리는 나중에 들을 테니 우선 앞부터 봐. 온다.”
내 경고에 무연이 앞으로 시선을 고정하니 기다렸다는 듯 허공이 일그러진다.
초록색 빛을 뿜으며 일그러지던 허공은 이내 틈새가 벌어지며 공간이 생겼다.
“녹색….”
무연이 작게 속삭인다.
녹청적백. 마경문의 단계를 나타내는 색의 순서였다. 다행히 녹색이면 가장 낮은 위험도를 가진 마경문이었다.
-크르르릉….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
마경문을 타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들개였다. 정확히는 들개의 외형을 하고 있는 마물.
들개의 외형에 이마 중앙에 뿔이 달린 묘한 모습의 마물이었다.
“하필 조금 껄끄러운 놈이네.”
녹각견(綠角犬).
재빠른 발놀림에 바위를 씹을 수 있는 송곳니를 가진 마물, 과거 무림맹에서 마물을 한 번 길들이고자 시도했던 놈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실패했다.
‘숫자는 열 마리 조금 넘어가나.’
마경문에서 나오는 마물의 숫자를 따지자면 평균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숫자였다.
마물에겐 지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망설임 같은 건 없다는 의미다.
녹각견이 우릴 발견하고 곧바로 달려들었다.
무연도 마찬가지로 놈들에게 도약했다. 발톱을 피한 무연의 검이 놈의 뿔을 잘라냈다.
단 한 차례의 검.
무연의 검에 검기가 일렁이는 것이 그가 일류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뿔이 잘린 녹각견이 그대로 풀썩 쓰러진다. 놈들에겐 뿔이 약점이었다.
다른 호위들도 마찬가지로. 마물과의 대치를 시작했다.
마차를 중심으로 마물을 사냥하던 이들 틈에서 나는 주섬주섬 바닥의 흙을 집었다.
-크르르르….
무연이 다른 놈을 상대하는 틈을 타 날 노리는 놈이 다가온다.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이 먹잇감을 발견한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어리고 나약해 보이는 모습.
놈들이 노리기 딱 좋은 상태란 말이었다.
-크아앙!
녹각견이 울부짖으며 달려든다. 몸에 은은히 돌고 있던 구염화륜공을 보다 빠르게 회전시킨다.
몸에 후끈 열기가 돋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평소보다 빨라진 몸을 틀어 한 끗 차이로 놈의 손톱을 피했다.
그리곤 곧바로 뒤돌아보는 놈에게 집고 있던 흙을 던졌다.
-크아앙!
시야가 차단된 놈이 이리저리 허공에 대고 위협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놈이라 눈이 보이지 않은들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위를 집어다 놈의 근처로 던졌다. 쿵! 하는 소리에 녀석이 반응한다.
몸 전체에 회전시키던 구염화륜공을 팔에다 몰아넣었다.
‘망설이면 죽는다.’
신경이 바위에 쏠린 틈을 타 짧게 도약해 놈의 옆구리에 팔을 쑤셔 넣었다.
-푸욱!
녹각견의 약점은 뿔이지만 마물이 가진 공통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었다.
몸 안에 품고 있는 마석(魔石)이다.
심장이 없는 놈들에겐 마석이 곧 심장이었다.
검수가 아닌 데다 지금의 몸으론 뿔을 부수거나 할 수 없기에 강화된 팔을 놈의 몸에 쑤셔 넣고 마석을 잡아 뽑았다.
걸리적거리는 질감이 있었으나 내공을 한껏 두른 팔이 살을 파고들어 마석을 찾아 집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퓻!
손이 뽑혀 나오며 마물임을 증명하는 파란 핏물이 터져 나왔다.
-끄르륵…!
아까 뿔이 잘렸을 때처럼 녹각견이 쓰러졌다.
마석을 손에 들고 뒤돌아보니 다른 녹각견이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크아아앙!
“아, 이건 좀…!”
팔에 몰린 구염화륜공을 다급히 다시 몸 전체로 돌리려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날 선 이빨이 내게 박히려던 순간 섬광이 녀석의 뿔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연의 검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십….”
무연이 내 앞에 옆구리가 뚫려 쓰러져있는 녹각견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 객기부리다 죽을 뻔했네.”
“예…. 다행입니다.”
묘한 눈으로 날 보는 게 느껴진다. 회귀한 첫날에도 느껴졌던 시선이다.
무슨 눈빛일까 대체….
마물을 사냥하는데 끝나는 시간은 생각 빨랐다.
아무래도 직계를 호위하는 이들이기에 가장 낮은 등급에 마경문에 곤란해할 이들은 아니었다.
표국에서도 표행을 진행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것이 마경문이었다.
마경문의 존재가 익숙해진 세상에서 이 정도 일은 그저 운 나쁜 사고에 불과했다.
나타난 모든 마물을 죽이자 마경문은 허공에서 사라졌으나 남은 마물의 시신은 그대로였다.
“그럼 남은 건 구가의 전서를 보낼….”
무연에게 말을 걸다 입을 닫았다.
손바닥이 찌릿찌릿한 느낌이었다.
전생에 지겹도록 느꼈던 익숙한 기운이다. 착각할 리 없었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마석을 들고 있는 손을 쳐다봤다.
초록빛을 띄고 있던 마석의 색이 점점 옅어지더니 투명하게 변했다.
동시에 작지만, 차곡차곡 몸에 내공이 쌓이는 것이 느껴진다.
입술이 덜덜 떨린다. 나는 이런 현상을 전생에 질리도록 겪어왔다.
마석이 가진 힘을 뽑아다 몸으로 흡수하는 무공.
“시발, 대체 이게 무슨 좆같은 일이야…!”
이건 분명 천마의 무공이었다.
악몽 (1)
주위가 어두컴컴하다.
밤이라기엔 이질적이고 아니라기엔 모순적이다. 달이 떠 있는지 확인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도 하늘도 분명 있어야 할 것들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주위의 나무란 나무는 죄다 불타있었고 전각이 세워져 있었을 자리엔 다 타버려 잿불만 남아 있었다.
천천히 몸이 움직인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몸의 소유권을 찾아보려 하지만 들어먹질 않는다.
한 발짝 띄려는데 누군가 발목을 잡는 게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피투성이의 사내가 보인다.
흰옷에 매화 문양. 중원에 너무나 잘 알려진 문파의 무복이다.
화산파(華山派).
그래, 이곳은 화산이구나.
화사히 피웠을 꽃들이 모두 불타 원래의 모습이 사라졌으나, 여러 세기 동안 자리 잡아 섬서를 지켜왔을 명문.
그 모든 역사가 지금은 사라졌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꿈이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
[어찌 이러셨소…!]
사내가 내게 말했다. 얼굴에 담긴 억울함과 원망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잘려나간 팔을 두고 남은 왼팔로 꾸역꾸역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핏줄이 터져 붉게 보이는 눈은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다고…!! 어찌 우리에게 이러는 것이오!!]
핏줄이 터져라 소리치는 목소리. 주위엔 사내와 같은 무복을 입은 이들의 주검들이 널려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의 인물까지 구별하지 않은 체 모두가 숨이 멎은 상태였다.
그것도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당신이 정녕 인간이 맞소…? 어찌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단 말이오!]
침묵을 지키던 몸이 입을 열었다. 이 또한 내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들리던 소리가 멈췄다.]
[뭐…?]
[너희가 온 힘을 바쳐 존경하던 매화선(梅華仙)이 교주님께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개소리! 장문인이 고작 그딴 악귀에게……!]
[그토록 아끼던 화산이 잿불이 되었거늘, 아직도 알지 못하는 건가.]
입 닥쳐 제발…. 입 닥치라고.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명문이라 이름을 붙이기엔 역겨울 만큼 초라하구나.]
서서히 무릎을 굽혀 사내와 시선을 가까이한다. 사내의 눈에 담긴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분명 그건 두려움이었다.
[보아라, 네가 그리 아끼던 사제들은 내 손에 죽고, 너를 그리 아끼던 사형들 또한 내 손에 죽었다.]
핏물이 가득한 손으로 사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사형제들의 피가 묻은 손이었다.
끄드드득.
사내의 입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이가 부서지는 것 같다.
[화산이 불탄 것도, 네놈이 이리된 것도 전부 나약하고 무능해서 그렇다. 화산도 네놈도, 매화선도.]
[입 닥쳐라 마귀…! 정파를 배반하고 등에 칼을 꽂은 네깟 놈의 입에 오를 이름이…!]
나는 더 이상의 잡담은 없다는 듯 사내의 목을 잡아 꺾었다.
화산의 마지막 남은 문도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찰박.
넓게 깔린 피 웅덩이 사이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인기척을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시선은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
그가 가진 존재감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이른다.
섬서의 태산과 같던 화산은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숨겼다.
가까이 마주하는 것만으로 모든 감각이 위험 신호를 보낸다.
천마(天魔).
그는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나쁘지 않구나.]
소리가 들림에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남성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여성의 목소리인가.
굵은 듯하면서도 여성처럼 얇은 음색으로 들리기도 했다.
천마가 툭 하니 내 앞에 무언갈 던졌다.
마치 잡아 뜯은 듯한 노인의 목.
이는 다름 아닌 화산의 절대 고수라 불리던 매화선의 목이었다.
[본좌를 기쁘게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나, 얕은 즐거움까진 얻어갈 수 있었다.]
중원 삼존자는 아닐지라도 그와 동급으로 보던 고수가 이리 쉽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전투가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인 듯 평온한 모습의 천마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앞으로 다가온다.
[마치 짐승이 날뛴 것 같구나.]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네게 붙여줄 이름은 본좌가 고민할 필요가 없겠어.]
깨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꿈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지?
[너는….]
천마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
“련님…!”
[...지금부터.]
“도련님!”
위설아의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
나는 구룡회를 마치고 구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웨에에엑!”
꿈에서 깨자마자 다급히 마차를 세워 뛰쳐나갔다.
부글거리는 것을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땅에 주저앉아 토악질을 뱉어냈다.
오늘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 끝도 없이 쏟아졌다.
‘시발…. 시발!’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꿈을 꾸게 됐지.
애써 잊은 척 살던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을 뜯어내 버리고 싶을 만큼.
내 등에 손길이 느껴진다. 휙 돌아 잡아챘다.
떨리는 손으로 잡고 보니 위설아의 손이었다.
위설아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두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꿈속의 사내가 내게 보이던 두려움과 겹쳐 보였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떻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엉망일 것이다.
쉽사리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우선 주고 있던 손에 힘을 천천히 풀었다. 위설아는 겁먹은 표정을 숨기고 오히려 차분하게 내 등을 다시 토닥인다.
마차를 호위하던 무연 또한 다급히 뛰어왔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당장 의원을…!”
“괜찮으니까 진정해…. 여기서 의원을 어떻게 구해.”
아직은 세가로 돌아가는 산골이다. 근처에 의원을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지만, 쉽사리 진정 되진 않는다.
화산파가 마교의 손에 멸문 당하던 날의 기억.
구파일방의 검문이 고작 하루 만에 무너졌던 날이다.
잊고싶던 일이었으나, 고작 꿈으로 마주했다고 이 꼴이 나다니.
‘...없었던 일이야,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이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뇌는 말이다.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하물며 숨을 쉴 때조차 되뇌는 생각이었다.
“....시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죄업은 한 번 죽어서도 결국 잊지를 못하는 걸까.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진정되지 않자 결국 몸에 내공을 둘러 강제로 진정시켰다.
효율이 좋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빨리 출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구염화륜공을 돌리니 몸속이 따뜻해진다.
안 그래도 쥐뿔도 없는 내공인데 악몽 꿔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겠다고 쓰고 있으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진짜 개같은 기분이야..”
조금 진정이 됐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위설아가 부축해주려 하지만 애써 괜찮다며 살짝 밀어냈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걸까.
과거로 돌아왔어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탓일까.
‘신경 쓰지 말자, 그냥 악몽일 뿐이야.’
한 움큼 게워내고 났더니 그래도 정신이 좀 맑아진 느낌이었다.
꼬인 속은 가면서 심법으로 풀든 좀 더 쉬면서 풀든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때, 내기로 인해 발달한 오감에 뭔가 느껴졌다. 등골을 콕콕 찌르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에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재수도 없지.’
꿈자리도 사나운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리 액땜을 하는 것일까.
마차로 올라가려던 몸을 돌려 무연에게 다가갔다.
나는 다급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무연에게 말했다.
“무연.”
“예, 도련님…! 역시 의원을 한 번 찾아볼까요?”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말고 얼른 마선부(魔線符)의 상태 좀 확인해봐.”
무연이 내 말에 싸늘한 느낌이 들었는지 재빨리 품 안에 부적 한 장을 꺼내 든다.
마선부는 과거 무당에서 개발한 부적으로 내기를 불어넣어 두면 근처 마경문이 나타날 시 신호가 나타나는 물건이었다.
품에서 꺼내든 부적은 아무런 신호도 나타내지 않고 멀쩡한 상태였다.
무연은 아무 일도 없는 부적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도련님, 갑자기 진지하게 그런 말씀 하시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무연이 말을 잇던 도중 부적이 붉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망설임은 없었다. 무연이 곧바로 주위를 호위하던 무인들에게 소리쳤다.
“마경문 발생! 전원 전투준비!”
무연이 소리치자마자 곧바로 주위 호위들이 검을 뽑아 든다. 혼란스럽던 분위기에 긴장감이 겹쳐진다.
하필 돌아가는 길에 일이 터지다니. 저리 급히 마선부가 불탔다는 것은 마경문의 위치가 매우 가깝다는 의미였다.
조금만 더 멀었다면 도주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중간에 마차를 멈춰 세운 내 탓이었다.
무연이 다급히 내 어깨를 잡는다.
“도련님 위험하니 우선, 마차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나는 무연의 말에 곧바로 마차 안으로 위설아와 다른 시종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곤 문을 닫고 무연의 옆에 섰다.
“도련님도 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입니다….”
평소였다면 그냥 마차 안에 박혀서 지나가길 기다렸을 테지만, 내 탓에 이리된 것이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사고를 안 쳤으면 모를까, 이번 삶에 내가 싼 똥은 스스로 치우며 살기로 했다.
그래야 전과 같은 일이 안 벌어질 것이다.
“도련…!”
“무연, 잔소리는 나중에 들을 테니 우선 앞부터 봐. 온다.”
내 경고에 무연이 앞으로 시선을 고정하니 기다렸다는 듯 허공이 일그러진다.
초록색 빛을 뿜으며 일그러지던 허공은 이내 틈새가 벌어지며 공간이 생겼다.
“녹색….”
무연이 작게 속삭인다.
녹청적백. 마경문의 단계를 나타내는 색의 순서였다. 다행히 녹색이면 가장 낮은 위험도를 가진 마경문이었다.
-크르르릉….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
마경문을 타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들개였다. 정확히는 들개의 외형을 하고 있는 마물.
들개의 외형에 이마 중앙에 뿔이 달린 묘한 모습의 마물이었다.
“하필 조금 껄끄러운 놈이네.”
녹각견(綠角犬).
재빠른 발놀림에 바위를 씹을 수 있는 송곳니를 가진 마물, 과거 무림맹에서 마물을 한 번 길들이고자 시도했던 놈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실패했다.
‘숫자는 열 마리 조금 넘어가나.’
마경문에서 나오는 마물의 숫자를 따지자면 평균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숫자였다.
마물에겐 지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망설임 같은 건 없다는 의미다.
녹각견이 우릴 발견하고 곧바로 달려들었다.
무연도 마찬가지로 놈들에게 도약했다. 발톱을 피한 무연의 검이 놈의 뿔을 잘라냈다.
단 한 차례의 검.
무연의 검에 검기가 일렁이는 것이 그가 일류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뿔이 잘린 녹각견이 그대로 풀썩 쓰러진다. 놈들에겐 뿔이 약점이었다.
다른 호위들도 마찬가지로. 마물과의 대치를 시작했다.
마차를 중심으로 마물을 사냥하던 이들 틈에서 나는 주섬주섬 바닥의 흙을 집었다.
-크르르르….
무연이 다른 놈을 상대하는 틈을 타 날 노리는 놈이 다가온다.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이 먹잇감을 발견한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어리고 나약해 보이는 모습.
놈들이 노리기 딱 좋은 상태란 말이었다.
-크아앙!
녹각견이 울부짖으며 달려든다. 몸에 은은히 돌고 있던 구염화륜공을 보다 빠르게 회전시킨다.
몸에 후끈 열기가 돋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평소보다 빨라진 몸을 틀어 한 끗 차이로 놈의 손톱을 피했다.
그리곤 곧바로 뒤돌아보는 놈에게 집고 있던 흙을 던졌다.
-크아앙!
시야가 차단된 놈이 이리저리 허공에 대고 위협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덩치가 큰 놈이라 눈이 보이지 않은들 위협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바위를 집어다 놈의 근처로 던졌다. 쿵! 하는 소리에 녀석이 반응한다.
몸 전체에 회전시키던 구염화륜공을 팔에다 몰아넣었다.
‘망설이면 죽는다.’
신경이 바위에 쏠린 틈을 타 짧게 도약해 놈의 옆구리에 팔을 쑤셔 넣었다.
-푸욱!
녹각견의 약점은 뿔이지만 마물이 가진 공통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었다.
몸 안에 품고 있는 마석(魔石)이다.
심장이 없는 놈들에겐 마석이 곧 심장이었다.
검수가 아닌 데다 지금의 몸으론 뿔을 부수거나 할 수 없기에 강화된 팔을 놈의 몸에 쑤셔 넣고 마석을 잡아 뽑았다.
걸리적거리는 질감이 있었으나 내공을 한껏 두른 팔이 살을 파고들어 마석을 찾아 집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퓻!
손이 뽑혀 나오며 마물임을 증명하는 파란 핏물이 터져 나왔다.
-끄르륵…!
아까 뿔이 잘렸을 때처럼 녹각견이 쓰러졌다.
마석을 손에 들고 뒤돌아보니 다른 녹각견이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크아아앙!
“아, 이건 좀…!”
팔에 몰린 구염화륜공을 다급히 다시 몸 전체로 돌리려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날 선 이빨이 내게 박히려던 순간 섬광이 녀석의 뿔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연의 검이었다.
“도련님! 괜찮으십….”
무연이 내 앞에 옆구리가 뚫려 쓰러져있는 녹각견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 객기부리다 죽을 뻔했네.”
“예…. 다행입니다.”
묘한 눈으로 날 보는 게 느껴진다. 회귀한 첫날에도 느껴졌던 시선이다.
무슨 눈빛일까 대체….
마물을 사냥하는데 끝나는 시간은 생각 빨랐다.
아무래도 직계를 호위하는 이들이기에 가장 낮은 등급에 마경문에 곤란해할 이들은 아니었다.
표국에서도 표행을 진행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것이 마경문이었다.
마경문의 존재가 익숙해진 세상에서 이 정도 일은 그저 운 나쁜 사고에 불과했다.
나타난 모든 마물을 죽이자 마경문은 허공에서 사라졌으나 남은 마물의 시신은 그대로였다.
“그럼 남은 건 구가의 전서를 보낼….”
무연에게 말을 걸다 입을 닫았다.
손바닥이 찌릿찌릿한 느낌이었다.
전생에 지겹도록 느꼈던 익숙한 기운이다. 착각할 리 없었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마석을 들고 있는 손을 쳐다봤다.
초록빛을 띄고 있던 마석의 색이 점점 옅어지더니 투명하게 변했다.
동시에 작지만, 차곡차곡 몸에 내공이 쌓이는 것이 느껴진다.
입술이 덜덜 떨린다. 나는 이런 현상을 전생에 질리도록 겪어왔다.
마석이 가진 힘을 뽑아다 몸으로 흡수하는 무공.
“시발, 대체 이게 무슨 좆같은 일이야…!”
이건 분명 천마의 무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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