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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

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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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58회 작성일 24-09-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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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서장

서장.

천마(天魔)가 죽었다.

그러면서 길고 길었던 정마대전 또한 같이 끝이 났다.

수년 동안 지속하던 지옥 같은 시간이 천마가 죽음으로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마교의 패배를 많은 이들이 환호하며 행복해했다. 이제 겨우 평화를 되찾았다고.

하지만 전쟁 끝에 남은 것이 끝을 냈다는 후련함과 평화만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정파 무림을 받치고 있던 구파일방의 두 곳이 불타 사라지고 사대 세가 중 한 곳이 무너졌다.

중원 무림에 무수히 많은 무인 중 삼존(三尊)이라 불리던 천외천의 고수들이 천마의 손에 모두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비록 천마를 죽여 마교를 이 땅 위에서 지우는 데 성공했다지만 손해만 가득한 전쟁인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았다.

흩어진 것과 무너진 것을 되찾아 원래대로 만드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많은 것이 불타 사라져 재가 되었어도 절망뿐인 남은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는 희망이 피어날 것이고, 위기를 이겨내고 협의를 이어갈 영웅들이 점차 나타날 것이다.

단지.

내겐 상관없는 얘기였다.

“어디에 있지?”

여인이 작은 목소리라 읊조렸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무림맹(武林盟) 지하에 있는 고문실이었다.

유난히도 가냘파 보이는 몸선에 희고 고운 피부다.

고된 투쟁이 반복되어 엉망이 된 머릿결을 애써 뒤로 묶어내어 다소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녀가 가진 이목구비는 그조차 고귀하게 만들었다.

세상이 썩고 갈라졌을지언정 그녀만큼은 홀로 빛날 것 같았다.

그 누가 알았을까.

저 여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재앙과 같던 천마의 목을 벨 줄이야.

기껏 해봐야 유망한 후기지수로 불리던 소녀가 훗날 천하제일인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신검(神劍) 위설아.

천마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검존(劍尊)의 직계 제자이자, 정마대전 이후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불리는 여인.

이제 갓 이립이된 여인이 그러한 위치에 오른 것은 현시대에 삼존이 없어서라는 편리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가볍게 휘두른 검 한 자루로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일 검으로 수백의 마인을 도륙했다.

이윽고 천마와의 결전에선 삼일 밤낮의 치열한 전투를 끝으로 천마는 물론이며 천마신교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으니.

그녀는 분명 자신의 힘만으로 천하제일인 이라는 오만한 이름을 쟁취한 것을 당대 무림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어디 있냐고 물었어.”

고된 고문으로 흘린 핏물로 흐릿한 시야에 그녀의 옷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하얀색이었을 무복은 어딜 그리 헤집고 다녔는지 재가 잔뜩 묻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 대답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성대가 부서진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위설아 또한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이리 구는 것은 그만큼 답답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당신은 알고 있겠지? 남은 마인들이 어디로 간 건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당신에게 마지막 양심이라도 있다면….”

위설아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하니 적어서든 그려서든 알려주길 바라고 있다.

그 증거로 내게 가득했던 족쇄는 진작 풀어져 있었다.

죄인의 속박을 함부로 푸는 게 위험하지 않냐 하면서도.

어차피 신이라 불리던 천마조차 죽인 그녀에게 내가 감히 생채기조차 낼 수 있을 리 없기도 했다.

다만 그녀가 원하고 내 마음이 그렇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게 걸려있는 족쇄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기에 위설아의 말에도 나는 공허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뿌득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위설아의 손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회야, 모두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지만, 이번만큼만 도와준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당신 목숨만큼은 살려줄게.”

전쟁이 끝나고, 천하제일이라 칭송받는 그녀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그녀가 내게 이리도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놓쳐버린 마인에 대한 증오? 복수심?

당연히 없진 않겠지만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유성검 탓이겠지.’

유성검 장선연과 위설아와의 관계는 중원에 유명했다.

무림을 이끌 유망한 검수이자 협객이라 불리는 그는 위설아와 혼약 관계였다.

그리고 장선연이 현재 행방불명이며 마인들 손에 납치당한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탓에 이러는 걸까.

누구보다 강한 여인이 고작 남자 한 명 때문에 이렇게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말해. 어디에 숨어있는지.”

위설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노려본다.

문득 퍽 우습게 느껴졌다.

과거엔 그녀와 내가 이렇게 망가져 버린 관계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어디서부터 잘못됐냐면 끝도 없고. 돌고 돌아 모든 게 내 업보였으니 꺼내올 기억은 아니었다.

그저 하찮은 자신이 역겨울 뿐이다.

나는 무수한 이들의 등에 칼을 꽂고 마인으로 돌아선 배반자고.

그녀는 모든 이를 받치고 잡아 일으킨 영웅이었으니.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이내 포기한 듯 위설아가 날 내동댕이쳤다.

까슬까슬한 돌벽에 부딪혔으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잔뜩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당신이 이토록 추악한 인간일 줄 알았다면. 처음 본 그 순간 죽였을 텐데.”

그게 너무 후회돼.

조용히 속삭인 뒷말이 내 귀에 유독 크게 들렸다.

나와 처음 본 순간.

위설아는 과연 언제라 기억할까.

아마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아니면 스쳐 간 과거기에 굳이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녀에겐 별 의미 없는 기억이겠지.

내게는 그녀와 다르게 크고 작게 쌓인 후회 중에 큰 편에 속하는 기억이었다.

곱게 갈린 파편들 사이에서 바닥 깊게 깔린 과거의 기억.

대체 그게 뭐라고 여기까지 왔을까.

-끼릭

철창문을 닫고 나가려던 위설아가 인기척에 발을 멈췄다.

고갤 돌려 바라본 시선엔 망가진 몸으로 삐걱거리는 내가 있었다.

싸늘한 눈으로 날 보던 위설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흔들거리는 손으로 핏물을 먹물 삼아 바닥에 무언갈 적고 있었으니.

한 줄 적어 갈 때마다 핏물이 벌컥벌컥 올라온다.

내게 걸린 저주는 분명했다.

조건을 어기면 심장이 터져 죽는 천마의 마공.

‘마교를 배신 하지 말 것’이라는 간단한 몇 글자에 내 목숨이 묶여있었다.

이걸로 인해 죽어 나가는 이들을 수없이 봤다.

겨우 삼류 무인부터 절정에 이르길 천마의 마공 앞에는 부질없었다.

천마조차 죽인 그녀라면 내게 걸린 저주를 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이제 와서 이걸 푼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조금 궁금했다.

글귀 한 줄을 그을 때 진작 터졌어야 할 심장이 버티는 건 내 정신력 덕분일까 그저 기적일까.

뭐든지 어차피 다 부질없었지만.

“뭣…. 야….”

급히 다가온 위설아가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무시한 채 행동을 이어갔다.

내가 하는 걸 막지 않는 걸로 봐선 그녀 또한 원하고 있는 거겠지.

누명이라고, 사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하면 믿어줄까.

그럴 리가.

이유가 있었다는 둥, 어쨌고 저랬고 늘어놓을 변명은 너무나 많지만. 여기까지 와서 챙겨갈 감정 따윈 없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쿵쾅 거리는 심장을 무시한 채 한줄 한줄 힘겹게 적어갔다.

그때마다 입에서 턱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위설아가 뭔가 이상한걸 눈치 챘는지 내게 손을 내밀지만.

내가 그보다 먼저였다.

마지막 글귀를 끝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심장이 퍽! 하며 터졌다.

바닥에는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마인들이 숨은 곳과 몇 안되는 정보가 적혀있었다.

휘청 거리며 쓰러지는 나를 위설아가 부축해 안았다.

바닥에 애써 적은 글이 망가질까 그랬을 것이다.

위설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몸은 싸늘하게 식고 이어 의식이 끊어지길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왜 이런 삶을 살았는가.

이유가 뭐든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

산서구가의 구양천.

정파명가에 태어나 정파인으로 살다 마인으로 변절.

정마대전에서 마교가 패배한 이후 붙잡혀 고문을 받다 사망.

몇 줄 안되는 저정도가 딱 내 삶을 표현하기 적당할 것 같다.

참 별볼일 없는 삶이다.

그 별볼일 없는 삶 마저 이젠 끝이었다.

“감쟈 머글래?”

“응?”

분명 그랬어야 했다.

EP.1 구가의 소공자(1)

구가의 소공자. 1

이게 무슨 일일까. 이걸 대체 무슨 일이라 봐야 할까….

나는 지금 시끌벅적한 장터 한가운데 있었다.

천천히 고갤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 태양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눈이 찌푸려졌다.

오랜만에 본 태양이 심히 눈이 부셨다. 오가는 인파들과 많은 노점상이 눈에 띈다.

어느 곳은 만두를 찌는지 풀풀 나는 김과 함께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무언갈 파는 상인들의 목소린 높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구경하는 인파들의 작은 말소리는 함께 섞여 그보다 더 크게 들린다.

먼 과거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지역의 장터가 딱 이랬다. 이렇게 활발한 장터를 보는 게 얼마 만일까. 아마 근 십 년은 본 적 없는 광경일 것이다.

‘꿈인가.’

나는 분명 심장이 터져 죽었다.

그럼 이건 무슨 상황일까. 죽은 뒤에 보여주는 잠깐의 환영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평화롭던 과거를 동경했던 건가?

비루했던 인생이라 이런 평범한 것을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우습네.”

툭 뱉어진 말에 깜짝 놀랐다. 말이 나오고 있었다. 목이 다친 뒤론 말을 할 수 없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가늘고 높다. 마치 어린 소년의 목소리 같았다. 그제야 흉터 하나 없이 뽀얀 손을 살펴봤다.

얇고 가는 것이 성인 남성의 손이라기엔 한참 부족해 보였다.

시야도 평소보다 적어도 한 뼘은 낮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분명 아이의 몸이었다.

“어릴 때의 기억인가.”

그렇다면 언제쯤일까. 장터에 이토록 자유롭게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근처를 둘러보니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는 젊은 청년이 눈에 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자가 내 호위였을 터다.

그리고, 그 아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몰래 나왔을 때였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장터를 휘적이며 다니다 우연히 마주쳤다.

그저 거리를 걷다 우연히 또래를 만났다며 처음 본 나를 심하게 반기던 아이가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자기 머리보다 커 보이는 박 안에 따끈따끈한 감자를 잔뜩 넣고선 내게 들이밀었었다.

“감쟈 머글래?”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응?”

눈치채지 못한 사이 누군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당황스럽네 이런 것까지 재현됐다는 게.

이때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이깟 걸 들이밀어!’

아마 이게 내가 했던 대답이었을 거다. 아니면 더 한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아이의 추레한 옷이 문제였는지, 들고 있던 감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냥 내가 철없고 싸가지가 없었겠지. 무슨 변명이 더 필요했겠냐만은.

그 아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훗날의 이야길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그러지 않았을까?

사실 확신이 잘 서지는 않는다. 나는 그만큼 막무가내였고 철이 없었으니까.

“..어…. 어…. 감자는…. 싫어?”

아이는 내가 반응이 없자 머뭇거리며 눈치를 본다.

어딜 그렇게 굴러다녔는지 옷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뿐 아니라 기르기만 잔뜩 기르고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머리는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있었다.

잘못 보면 거지 굴의 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 그걸 보고 내가 피식 웃었다.

“...이런 것도 보여주는 걸 보니 미련이 많이 남았었나.”

“웅?”

아이가 내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이런 환상으로 내 후회를 하나 없앨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그럼에도 나는 아이가 가진 박에서 감자 하나를 꺼냈다. 내가 감자를 꺼내는 걸 보고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앞니 하나는 어디다 뒀는지 이빨이 있어야 할 위치에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나는 아이의 미소를 보며 말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내 기억 속 그때와는 분명 다른 말이었다.

“우응…! 그거 우리 할부지가 캔, 캔 거야!”

힘차게 대답하더니 박에서 감자 하나를 꺼내 입에 가득 베어 물었다.

나도 아일 따라서 감자를 한입 베었다.

문제는 김이 펄펄 나던 감자라 심하게 뜨거웠다.

묘한 이질감이었다.

‘꿈인데 뜨겁다고?’

그럴 수 있나? 아니면 그저 유독 현실적인 꿈이라 그런 걸까. 와중에 감자가 너무 뜨거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하하! 얼굴 빨개졌어!”

아이는 내가 발버둥치는 게 재밌는지 또 웃는다. 본인이 먹은 감자도 뜨거울 텐데 용케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었다.

한참을 허둥거리던 나는 고통을 참으며 겨우 감자를 전부 삼켰다.

“맛있지?”

“응…. 맛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감자는 분명 맛있었다.

왜 꿈인데 맛까지 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놀랍게도 감자는 맛있었다.

그렇게 손에 남은 감자를 열심히 먹고 있자니 내 호위 역으로 보이는 청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도련님…?”

다가오던 호위는 내 앞에 있는 아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곧이어 왼손을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에 올린다.

“지금 감히 누구 몸에….”

“약과 있어?”

“예?”

“약과 있냐구.”

내가 말을 끊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뜬금없이 호위한테 약과가 있느냐고? 놀랍게도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호위가 품속에서 싸놨던 약과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거 먹을래?”

나는 호위에게 받은 약과를 아이에게 건넸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이가 충분히 놀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 진짜? 나한테 주는 거야!?”

“맛있는 감자를 줬는데, 나는 줄게 이것밖에 없네.”

단 것을 입에 달고 살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때문인지 호위조차 날뛰는 날 말릴 때면 이런 식으로 입에 약과를 물렸었다.

호위하는데 약과를 챙겨다녀야 했다니…. 이러려고 무공을 배웠나 자괴감 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많이 미안한 일이지.’

내 생각을 모른 체 아이는 약과를 받아들고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힘차게 뛸 때마다 품에 안은 박에서 감자가 떨어질까 사뭇 불안했다.

“고마워! 이런 거 처음 먹어봐!”

“그래? 혹시 약과 더 있어?”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좀 더 줄까 싶어서 물었지만 아쉽게도 마지막이었다.

와중에 내 행동이 많이 이상했는지 호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닙니다.”

아이는 품에 안고 있던 박은 진작 땅에 두고선 혹시 약과가 떨어질까 소중히 손에 잡아 입에 한입 물었다.

약과를 베어 물자 작은 어깨가 들썩인다.

“너, 너무 맛있어….”

“미안해, 더 주고 싶은데 그게 마지막이었데.”

내 말에 열심히 고갤 도리질 친다.

괜찮다는 걸까, 아쉽다는 걸까.

성인 주먹만 한 감자도 눈 깜짝할 사이 먹어치우던 아이라 그런지 약과쯤은 몇 입 먹으니 사라졌다.

그게 아쉬운지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 보였다.

“이런 거 처음 먹어봐….”

“맛있었다니 다행이네.”

아쉽다는 듯 다시 박을 집어 들고 감자를 먹지만 아까와 같은 흡족한 얼굴은 아니었다.

벌써 단맛에 길이 들어버린 걸까?

아이는 꼼지락거리다 물었다.

“고마워, 너는 이름이 뭐야?”

커다란 감자를 건넬 때와는 다르게 사뭇 수줍어 보인다.

이름을 물어보는 게 더 부끄러운 걸까?

“구양천, 내 이름은 구양천이야.”

나는 또박또박 내 이름을 뱉었다. 스스로 참 오랜만에 뱉어보는 말이었다.

“구양천….”

아이는 이름을 듣곤 수줍게 웃었다. 곧이어 우물거리는 입으로 무언갈 말하려 하지만

인파의 틈을 비집어 헤치고 노인이 불쑥 나타나 아이를 감싸 안았다.

“위아야!”

“어, 할아부지!”

“할애비가 함부로 손 놓고 다니지 말라 했잖아!”

놀랐을 법도 한데 아이는 끌어안은 노인의 품에 오히려 파고들었다.

그리곤 되레 화내려는 노인에게 해맑게 웃는다.

“위아는 괜찮아! 감자도 잘 챙겼어!”

아이는 품에 안고 있던 박 주머니를 자랑스럽게 노인에게 보였다.

아직도 김이 나는 감자는 둘째 치고 노인은 아이를 품에 안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겁에 질린 얼굴이다.

거리와 맞지 않게 깔끔한 옷 때문일까 귀한 집 아이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아닐까 하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저희 손녀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혹시 신경 거슬리게 하는 행동을 하거나 한 건 아닌지….”

나는 노인의 저 후줄근한 모습도, 자신의 가슴팍에도 오지 않은 작은 아이의 눈치를 보는 처량한 얼굴도 다 연기임을 알고 있다.

저 노인은 감히 현 무림 맹주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인이며 셀 수 없이 많은 무림인의 하늘 위에 있는 천외천이 분명했으니.

“괜찮습니다. 어르신. 마침 배가 고팠는데 고맙게도 감자를 건네주기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이답지 않은 말투라 그랬을까. 노인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조금 과하게 한 게 아닌가 싶지만, 뭐 어때 어차피 꿈일 텐데.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게 자그마한 약과밖에 없었던 터라…. 받은 것에 비해 보잘것없어 오히려 죄송합니다.”

말과 함께 최대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여전히 노인은 말이 없었다.

아까완 다르게 조금은 진중해진 눈으로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시끌벅적한 인파 틈에서 나와 노인 사이에 작은 정적이 이어진다.

이어 얼마 가지 않아 짧은 침묵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호위였다.

“...도련님 이제 돌아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호위는 우습게도 말은 침착했지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동자는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말을 듣고 천천히 자세를 풀었다.

“벌써?”

“예, 시간이 더 지체된다면 해가 저물고서야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야지.”

고갤 돌려 노인을 다시 봤을 땐 아까와 같은 어수룩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르신, 그럼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인사에 노인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아이의 말이 더 빨랐다.

“벌써 가…?”

노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아쉽다는 듯 나를 쳐다봤으나 딱 여기까지가 적당했다.

추악하게나마 꾸며보려던 과거의 기억도, 가끔 떠올리며 후회했던 얘기도 딱 여기까지였다.

‘이젠 꿈에서 깨야지.’

이만하면 됐다.

무엇이 달라졌냐 묻는다면 아무것도. 속이 좀 후련하냐 묻는다면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또한 여기까지만 해야 했다.

속마음을 숨긴 채 아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 감자는 다시 말하지만 정말 맛있었어.”

가볍게 손을 흔드니 아이가 활짝 웃으며 두 팔 벌려 호응해준다.

노인은 연신 고갤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하길 반복했지만,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 모습이 더 무서웠다.

사과를 계속하던 노인은 이내 아이를 품에 안아 들고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식겁했네.”

노인의 이름은 위효군.

길고 길던 무림 역사상 처음으로 사파를 통합하고 사천땅을 집어삼키려던 흑룡검의 심장에 검을 꽂은 정파의 상징이자.

십 년 전까지 무림맹의 맹주 자리에 앉아 사파인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인물이다.

더불어 노인을 부르는 다른 말로는 검존(劍尊)이 있으며.

노인은 과거 무림맹의 맹주 직위를 넘김과 동시에 종적을 감추며 사라졌다.

그런 그가 어찌 이곳에 저런 볼품 없는 모습으로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애초에 그 누구도 저런 추레한 노인이 천하 삼존중 한 명일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노인이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호위의 재촉에 나 또한 등을 돌렸다.

문제는 그가 검존이고 아니고는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검존의 품에 안겨 내게 손을 힘껏 흔들던 소녀가 자꾸 눈에 밟혔다.

감자를 건네주며 배시시 웃던 모습과 약과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던 모습은.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마인을 베어 가며 끝내는 천마의 목을 베어버렸던 그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검 위설아.

아이는 다름 아닌 그녀였다.

방금이 바로 나와 위설아의 첫 만남이었다.

물론 내 기억 속에선 이렇게 사이좋게 헤어지진 않았었지만.

과거엔 폭언을 뱉으며 감자가 든 박을 내팽개쳐 버렸었다.

상처받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어린 위설아를 두고 한참 비웃다 자리를 떠났었지.

철이 없었다고 감싸기엔 너무나 못돼먹은 심보였다.

“...이제 나도 가야지.”

무엇이 그리 밟혔는지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걸 보고 있나 싶다.

그마저도 자기만족식으로 꾸며버렸으니 미련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도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랬어야 했다.

“예, 돌아가셔야지요.”

호위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내 말이 집으로 가자는 걸로 들렸나 보다.

정작 나는 어디로 가야 집이 나오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나저나 왜 안 깨는 거지?’

할 거 다 한 것 같으니 환상이고 꿈이고 깨야 하지 않나? 어쩐지 참 길게도 느껴졌다.

“도련님?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흐릿한 기억을 쫓아 걷다 보니 엉뚱한 길로 자꾸 빠졌다.

그때마다 호위의 지적을 길잡이 삼아 집으로 향했다.

‘모르겠다. 얼마 안 가 끝나겠지.’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는데 정작 상황이 끝나질 않는 꿈이 원망스러웠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자포자기식으로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겼다. 어차피 얼마 안 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시바 이거 왜 안 끝나지?”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꿈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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